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열세번째 날

sunking 2013. 9. 21. 12:41

 

산토 도밍고 광장의 아침은





오늘은 600m에서 800m 고지의 완만한 오르막 길을 걸을 것이다.
목적지 벨로라도 가는 길목에 마을은 모두 5개, 오늘은 여유롭게 길을 걸을 수 있겠다. 가는 길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볼일을 해결 할 수 있는 것도 염려 없겠으니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아침 7시 숙소를 나설 때 어제 저녁처럼 음식을 받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술이 덜 깬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광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기도 한다. 음식을 받아 들고 건물 한쪽에 앉아 먹고 있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밝고
사랑스럽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니까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한다. 광장엔 아직도 축제의 열기가 남아 있다.

여유를 배우고, '쉼'의 의미를 배우고,







오늘 아침 컨디션은 최상이다.
몸은 날아 갈 듯 가볍고, 머리는 세척이라도 된 듯, 맑고, 깨끗하다. 새벽까지 함께했던 오래된 친구와 은사님, 후배,
일하던 어줌마, 그들 모두에게 손짓으로 안녕을 하며 뒤로 보낸다. 함께해서 고마웠던 사람들, 내 인연의 한 고리를
끊어도 될 것 같다.
오늘 길은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만나는 마을마다 잠시 머물며 여유를 부린다. 살며 ‘쉼’에 익숙하지 못했다. 누구를
만나도 잠간, 방문을 해도 필요한 시간만큼만, 집에 머물 때도 누워 본 적이 별로 없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나는 이 길에서 여유를 만나고 ‘쉼’의 의미를 배워간다. 생각 없이 성당 광장의 벤치에 앉아 마시는 커피한잔, 하늘을
바라보며 한 입씩 베물어 보는 빵 한 조각, 그것이 나를 얼마나 충만하게 해 주는 시간인지 알 것 같다.

남아프리카의 친구 쎌리









남아프리카에서 왔다는 쎌리라는 친구를 만났다. 처음 인사하고, 처음 말을 나누는데,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한
이 느낌, 저 어느 먼 전생의 길에서 만났던 걸까? 아니면 이 친구가 갖고 있는 특별한 매력의 하나일까? 한 구간 마을,
2km를 함께 걸으며 기억할 수도 없는 얘기들로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그 친구가 걷는 길은 목적지가 없다. 걷다가
마음에 맞는 마을을 만나면 머문다고 했다. 어느 날, 만약 내가 배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저렇게 이 길을 나도 걷고
싶다. 걷다 처음 만난 정말 예쁘고, 고풍스럽고, 분위기 있는 마을에서 그녀는 멈췄다.







지나는 마을마다 죽음의 도시처럼 완전 정적이다. 성당의 첨탑만 우리를 맞았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밀밭,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 푸른 하늘의 하얀 뭉게구름, 걷고, 또 걷는다.

침통한 얼굴의 한 아줌마를 만났다. “안녕”이라며 손을 들고 인사를 했다. ‘저건 뭐야’하는 시큰둥한 표정.
‘푹’하고 웃음이 터진다. 맞아 어쩌면 남편하고 심하게 싸우고 “너 잘 살아라.”라고 문을 박차고 나와 이 길을 걷는지도
몰라. 그랬다면? 배낭 하나 짊어진, 그것도 키가 조그만 동양여자가 “안녕”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면?

문득 웃음이 없던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었고, 큰 소리로 웃는 엄마를 본 기억도 내겐 없다.
스산한 바람이라도 지나는 듯 엄마의 얼굴은 쓸쓸했다. 사람들은 엄마를 요조숙녀라했다. 엄마를 많이 닮고 태어났다.
‘얌전한 아이. 조용한 아이. 진지한 아이.’ 내게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던 형용사였다. 내게 붙은 그 형용사가 난 싫었다.

끝없이 끝없이 걷고 걸으며 실타래가 풀리듯 가슴 밑바닥에서 잠자던 얘기들이 자꾸만 손을 내민다.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 하나 불을 지폈나? 자꾸만 울컥인다.

도밍고 성인은 순례자 모두애개 생수 한병씩을.







수평선이 맞닿은 벌판 길, 한번씩 지축을 흔들며 폭발음이 들린다. 전쟁은 아닐테고, 그 소리에 조금씩 불안해진다.
마을이 가까이 올수록 소리는 커지고 잦아진다. 군악대소리 같은 것이 울린다. 성당 앞에 이르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
도밍고 성인을 기리는 축제일이란다. 울려 퍼지는 관현악단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모습이 흥겹다. 마을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 축제를 즐기는 흥겨움이 가득하다. 도밍고 상을 모신 신부님과 복사단의 행렬이 성당에 닿으며 연주는 끝났다.
작은 시골 마을의 흥겨운 축제장면을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기뻤던지, 이런 작은 마을의 축제를 전통처럼 지켜가고 있는
모습을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세상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살아가는 소박한 마을의 모습을 만난 것 같아
오늘은 내가 선물 하나를 받은 것 같다. 선물, 성당을 나와 걷고 있는 길에서 만난 어느 스페인 아저씨, 배낭을 메고 걷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생수를 한병씩 나누어주며 차를 운전하고 간다. 도밍고 성인은 아저씨 손을 빌려 순례자들에게
생수를 선물했다.

조용하고 소박한 벨로라도, 순례자들을 위한 저녁미사.







벨로라도 마을로 접어 들던 길, 오후의 금빛 태양이 눈부시다.
마을은 운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당은 굳건히 마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단 한마디의 말도 통하지는 않았지만 바디랭귀지만은 훌륭해 소통엔 지장이 없던 거칠지만 당당하고 씩씩한 알베르게
주인아줌마, 모델같이 날씬한 아래위 까망의 팻션, 벨트엔 쇠붙이 장식이 주렁주렁, 담배하나 꼰아 문 모습, 그래도
업무엔 치밀하게 빈틈이 없다. 뒷마당 정원에 나가자 빛과 바람이 좋다. 햇빛밝은 정원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메모장을
정리한다.걸어오느라 수고한 내 신발도 잘 모셔 놓는다. 해바라기를 하라고



주일 미사 예절도 올릴 수 있었다. 산토도밍고에서 만난 세명의 한국 젊은이들 (아가씨 두명과 듬직한 청년 한명 - 이
친구들이 날 어머니라 부르며 예쁘게 군다.)과, 내 숙소를 예약해줬던 형제 한분과 함께 식사를 했다. 동행하던  형제
한분이 발에 문제가 생겨 걷지를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아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