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열한번째날

sunking 2013. 9. 7. 18:29




 

황홀한 여명 속으로 아침을 가르다
아침 6시 30분, 숙소의 문을 밀고 나오자 빼곡한 집들 사이로 불붙듯 빨간 하늘이 보인다.
어제 하루 온종일 비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더니 오늘은 하늘에 붉은 보자기를 펼쳐 놓는가 보다.
여명이다. 이렇게 선명하게 맑고 고운 여명을 이 길에서 만나기도 하다니, 깊게 숨을 들이 마시고 하늘을 본다.
어느새 작은 친구들이 귀가 따갑게 따라와 아침 인사를 한다.
“힘들어?”
“조금 힘이 없어. 카페에 가서 커피한잔 마시면 힘이 날거야. 오늘은 나 따라 오지마. 만나야하는 사람들이 많아.”
“OK. 힘내, 힘내. 자 파이팅. 부엔까미노.”





로그리뇨 시내를 빠져 나오는 시간도 꽤나 많이 걸린다. 불타듯 아름답던 여명도 시내를 바져 나올 때 쯤 서서히
회색의 하늘로 바뀐다. 오늘 걸어야 하는 거리는 꽤 길다. 29km구간에 마을은 두 개 뿐이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 간격이 12km, 또는 16km니 걸음의 속도와 쉼터에 이르는 시간 조절을 잘 해야 할 것 같다.
로그리뇨의 아침 거리는 푸른 녹색으로 시작이다. 거리에 막 피기시작한 푸른 가로수, 조경이 잘 되어 있는 도시 외곽의 공원길,
조깅을 하고 있는 부지런한 이곳 사람들의 모습, 달리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부엔 까미노’ 또는 ‘올라’를 외치며
손 인사를 한다. 저만큼 걷고 있는 두 자매가 아무래도 한국인 같은데, 걸음이 너무 빨라 따라 갈 수가 없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지난 열흘을 돌아보다. - 잘 하고 있는 거야.
도시 끝자락 호수 가에 자리한 바에서 커피와 크루아상 하나로 아침을 챙긴다. 잔잔한 호숫가 벤치에 앉아 지나간 열흘을 되돌려 본다.

단어 하나 통하지 않는 이 낯선 곳에서  무사히 걷고 있는 내가 대견해  빙긋이 웃어본다.
“잘 하고 있는 거야. 의사소통 안 되서 못한 것 아무것도 없잖아. 자기들끼리 떠들고 하는 얘기 못 알아들어서 편한 건 또 얼마나 많으니? 

너무 알아서 병인 경우가 몰라서 불편 한 것 보다 훨씬 많았다는 걸 알고 있잖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해 준다면야 금상첨화겠지만 사람이란 그게 아니더라구. 알면 꼭 안다고 표를 내고 싶은 모양이야.

겸손이 그래서 힘든 건가봐.” 아침도 해결을 했고, 고요한 아침 호숫가의 정경도 즐겼고,

자, 이제 식수를 챙기고 떠나는 거야.








꿈은 나를 깨우고,
다음 만나는 마을은 나바레떼.  13km 걸어야 만나는 곳.
어젯밤도 어김없이 펼쳐 놓은 지난 시간의 사람들, 이번엔 오빠다.  수치스럽고 두렵고, 소름이 돋도록 싫은
순간을 오빠가 나타나 불같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구한다. 참 순한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그렇게 강렬한 힘이 나왔을까?

‘염려 하지마’라는 오빠의 눈빛을 보며 나는 얼마나 안도했던가. 자라며 많은 기억을 함께 나누진 못했지만 항상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던 다 살고 가지 못한 그 오빠가 왜 이 길에서 나를 찾아 왔을까?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꿈이 이젠 이 길에서 나를 놓아 주질 않는다. 아픔, 연민, 그리움, 그 숱한 마음의 실타래가 자꾸만 나를 감는다.







나바레테 성당의 황금빛 제대 - 1유로의 기적
나바레테의 성당 앞 광장은 멋진 쉼터였다. 중세풍의 집들이 모여 있던 나바레테는 까미노 길의 아름다운 마을의 하나다.

성당 앞 벤치에서 쉬고 있던 한국인 두 자매를 만났다. 로그리뇨 새벽 길, 걸음이 빨랐던 뒷모습의 여인네들이다.
“한국인이셨어요? 로그리뇨에서 뵐 때 일본 분인지 알았어요.” 아이고, 날 또 일본 사람이라고?
성당에서 만난 두 친구가 이 길을 걷고 있단다. 예쁘고 상량한 얼굴의 두 자매는 이제 중년을 조금 넘겼을까?
활달하고 명랑하지만, 편안한, 느낌이  좋은 분들이다. 같은 교우라며 반갑단다.

성당을 들어가 성체조배를 하기 전에 입구 동전함에 1유로만 넣으란다. 그러면 금빛 전등이 켜지며 너무 아름다운 황금빛 제대를

볼 것이라고. 부지런히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 앞에 빛나는 금빛 제대가 열려 있다.
하느님께 드릴 인사보다 카메라에 담자는 욕심이 먼저라 얼른 셔타를 눌렀지만 곧 캄캄해진다. 내 앞 사람이 넣고 간

1유로의 시간이 다했다는 것, 부지런히 1유로를 꺼내 앞에 보이는 동전함에 넣었지만 제대의 불은 들어오지 않고 

성모상에 초 하나가 켜진다.
조배를 마치고 나가 자매들에게 얘기하자 깔깔 웃는다. 성모님께 드리는 봉헌 초는 50쌘튼데, 잘 못 넣으셨네요.
어차피, 꿈의 오빠를 위한 봉헌금인데, 제대면 어떻고 성모님이면 어떻겠어. 외롭고 가엾는 당신의 힘없는 새끼들인데.





아! 대한민국 - 나는 내가 한국인인게 너무 자랑스러워
그들은 떠났다. 이제 나헤라까지 가는 길목엔 작은 마을 벤토사가 있다. 포도밭, 밀밭 사이의 4km의 황토길을 걸어 도착한 시간

오후 1시, 햇빛이 없어 더운지는 모르고 걸었다. 조금 지치고 있는 것 같다. 갈증과 허기가 인다.
이럴 때 눈 앞에 나타난 바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맥주 한잔과 몇 종류의 햄과 소시지로 점심식사를 주문해 들고

야외테이블로 나가자 그 곳에 나바라테 성당 광장의 자매들이 반갑다 손을 든다. 신기한가보다.

혼자 떠났다는 것도 그렇고, 내 나이가 당신들보다도 휠씬 많다는 것도 그렇고, 거침없이 맥주를 주문해 마시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내가 무슨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 민망해진다. 결론은 ‘용감하다’는 것? 과연 무엇이 용감일까? 한참을 얘기하다

그들은 일정으로 오늘이 까미노 길은 끝이라고 했다. 버스로 떠나야 한다며 떠났다. 
까미노길에서 한국사람은 심심찮게 만나진다. 젊은이들, 은퇴하며 길을 걷는다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 나란히 걷는 부부의 모습,

친구끼리 찾아 왔노라는 분들, 길을 걸으며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뿌듯해 지는 건, 내 나라의 위상에 대한 자긍심 때문 일 것이다.

어려운 시대를 헤치며 과정을 지나왔던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감동일 것이다.








하늘빛 수레꽃 길 - 나처럼 느린 친구를 만나다.
마을 마다 또는 구간 마다 꽃의 종류가 달라진다. 이 길에선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하늘빛 수레꽃과 엉겅퀴가 등장한다.
29km의 오늘 길은 조금은 내게 무리인 것 같다. 나헤라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닿을 무렵 무척 지치고 있는 것 같다.

걸음이 느려 일행이 없던 내게 동지 하나가 생겼다. 발의 통증으로 절룩거리는 미국인 데이빗, 보조가 그런대로 맞는다.

나헤라는 까미노 길에서 만나는 몇안되는 낙후된 마을, 지금까지 지나왔던 고풍스럽기도 하고, 동화의 나라처럼 예쁘기도하던

마을과는 달리 시멘트 막사같은 건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느 책에선가  까미노 길에서 가장 낙후된 마을이라고 씌어졌던 게 기억된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까지도 찾아서 몰고 오던 충직한 양몰이 개
갑자기 눈앞에 몇 백 마리는 될까 싶은 양떼가 목동과 양몰이 개들과 함께 나타난다.

마을을 들어가는 폭이 큰 냇물 속으로 양들은 첨벙대며 들어간다.

시냇물은 맑고, 냇가의 풀과 나무들이 싱싱하다. 양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길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있는 성경의 구절이 생각난다.

곧잘 따라가는 양들이 있는가 하면 죽어라고 열에서 빠져나와 장난을 치는 양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양몰이 개들은 좇아가 그 양을 끌고 온다.
말썽 부리는  마지막 한 마리 양까지 챙겨  몰아 오고  있는 개들의 모습을 보며 훈련일까, 태생일까
신기하기만하다. ‘충직한 종’이라면 개들이 화낼까?
양들의 이동이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일렬로 잘만 간다면야 7-8분아며 족하겠지만 끊임없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물속에서 장난을 치는 놈부터, 이것이 기회가 싶어 멀리 튀려는 녀석들까지. 보기야
사랑스럽기도하고 개구쟁이 장난질 같아  귀엽기도 하지만 양치기의 입장에선 골치 아픈 녀석들일 것 같다.
“대이빗, 네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 다윗인 건 알고 있지? 너도 양치기였는지 모르네.”
“그래서 내가 다윗의 시들을 좋아하지? 넌 종교가 뭐야?”
“가톨릭, 넌.”
“프로테스탄. 언제 교회를 갔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난 내 이름이 자랑스러워. 구약의 최고의 시인이잖아”









정갈하고 예쁜 가정집 같던 알베르게 - 하지만 최악의 밤. 
나헤라의 알베르게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꽤나 멀리 떨어져있다. 함께 걷는 일행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예약된 알베르게는 사설로 시설도 깨끗하고, 주인 아주머니는 3유로로 빨래와 건조까지 해 주던 친절한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를 할만한 식당을 찾고 있는데, 비아나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두명의 형제를 만났다.
반갑다고 인사하며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까미노 길에선 누구나 친구가 된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그 형제분들에게 내일 도착하는 산타도밍고 시립알베르게에 내 좌석도 하나 예약해 달라며 내 크리덴셜카드와 전화번호를 남겼다.

(숙박객이 많은 요즘 같은 철은 남보다 걸음이 빨라야  숙소를 얻을 수가 있다.시립알베는 사설의 반값일 정도로 저렴하다.)

기분좋게 들어 온 숙소, 하지만 난 최악의 순간을 맞는다. 모든 게 깨끗하게 정돈된 좋은 알베르게였는데,

온 밤을 뜬 눈으로 새우다 싶이 했다. 코콜이라는게 얼마나 큰 병의 하나인지를 실감했던 밤,

난 거대한 동물농장 한가운데 내 팽개쳐진 가엾은 들고양이 신세. 부릉거리는 탱크 바퀴 소린가하면 콤프레사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날카로운 기계음, 폭탄 터지는 소리등, 정말 대단한 밤이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아! 이건 끔찍한 악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