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 아홉번째 날
사람들에겐 상처라는 것이 있어.
해발 500에서 600m를 오르내리는 길, 경사가 심하지 않은 산길과 오솔길, 들길을 걸으며 20km.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부엔까미노”
어김없이 나의 꼬마 친구 새들이 찾아 온다.
“안녕, 꼬마들아.”
“어젯밤 꿈 얘기 해줘.”
“어젯밤에도 오래전부터 알던 몇구룹의 사람들이 보였어. 학교 후배들, 선배들,”
“잘 아는 사람들이야? 지금도 자주 만나는 친구들?”
“아니, 20년 또는 30년 전의 사람들, 내 삶에서 마주쳤던 사람들, 하나하나 나힌테 던져 주실 모양이야.
이 길에서.”
“왜?”
“글세, 나로해서 누군가 상처를 받았거나, 내가 그 누군가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다면 이 길 위에서
용서하고 화해하란 의미신 것 같아 .”
“왜 상처를 받는건데?”
“그래, 꼬마야. 우리 사람들에겐, 너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어. 다시 한번 내 삶을 돌려 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실라나 봐. 까미노 길의 땀방울이 상처 치유의 연고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면 그렇게 될거야.”
지독히 독립적이고, 깔끔한 룸메이트 - 박자가 맞지 않네.
구름이 낀 회색의 하늘, 햇살이 따갑지 않아 걷기엔 좋은 날씨다. 부드러운 바람까지 덤으로 살랑인다.
아침 7시10분, 기분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얼마를 걸었을까, 뒤 따라 오던 캐롤과 그의 아들, 알리가 발에
문제가 생겨 잘 걷질 못해 뒤에 쳐져 있단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본인은 괜찮다며 앞 서 가라했단다.
"네가 도와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떠났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어제부터 신경이
날카로 왔구나. 길가 벤치에 앉아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 저 멀리 불편한 발을 끌고 걸어오는 알리가 보인다.
“많이 아파?”
“물집이 생겼어. 발가락 두 개에. 바늘로 따고, 약도 발랐으니까, 아마 나을거야.”
“미안해. 아픈 것 몰랐어.”
“네가 알아도 방법이 없어. 걱정하지 말고 가.”
맞아, 저런 철저한 참을성과 독립성이 이혼 후 7남매를 키워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깐깐한 꼬장 배기같으니라구.
함께 천천히 걷자는 내 말에 느리게 가면 더 아픈 것 같다며 다리를 질질 끌면서 빠르게 걸어간다.
“여보세요. 미자씨, 다른 사람 염려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하세요.” 혼자말을 하며 픽 웃어 보지만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다.
어느새 꼬마 친구들. 쪼르르 귓가에 몰려온다.
“괜찮아, 알리가 가면 또 다른 알리가 네게 올거야, 이 길에선 만나고 헤어짐이 익숙한 일상이 되는 거야. 그래야
알리도 또 다른 친구 미자를 만나지.”
“고마워, 나한테 너희들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 친구야.
“하지만 발카노스에서의 첫 만남, 론세스발레스 가는 그 산 위에서 비를 맞고 날 기다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
많이 고마왔던 분이지.”
이름이 불려 질 때마다 네 마음은 따듯해지고.
오늘 까미노 길은 최고로 아름다운 5월의 축제가 열려있다. 숲 오솔길에도, 산길에도, 푸른 밀 밭 사잇길에도 꽃들은
지천으로 피어있고, 꽃과 나무와 풀 섶이 어우러지며 내는 향기는 대기에 가득하다. 걷는 길 중간 중간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 미국에서 온 메리, 네델란드에서 온 레이체, 나만 보면 생장에서부터 봤노라며 백년지기를 만난 듯 반기는
시실리 섬에서 온 아저씨, 걷고, 쉬고, 또 걸으며 너는 누구? 어디에서 왔어? 이름은?
아마 그렇게 많이 내 이름이 자연스럽게 불려 지기도 이 길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아닐까? 남녀노소 없이 한번 들은
이름은 스쳐 지날 때마다 불러준다. “하이, 미자.” 다정히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내 마음도 따듯해진다.
“내 이름 바꿔줘” 투정 부리던 작은 계집아이, 징징댈 때마다 엄마의 말씀. “돌아가신 니 아버지가 좋다고 지은
이름이야. 얼마나 부르기 쉽고 좋니?”
맞아. 엄마, 고마워. 사람들이 참 부르기 쉬운가봐.
보랏빛과 뻐꾸기의 울음은 순수, 왜 이렇게 쉼 없이 눈물이 흐르지?
유난히 보랏빛 꽃들이 눈에 띈다. 뻐꾸기도 쉼없이 나를 따라온다.
보랏빛과 뻐꾸기의 애절한 울음소리, 그들이 주는 이미지는 투명함, 맑고 투명함이 주는 느낌은 순수, 순수 앞에
서면 까닭모를 눈물이 흐르는 건 웰까? 길을 걸으며 오늘은 참 많이 눈물이 흐른다. 흐린 날씨임에도 깊게 모자를
눌러 쓰고 쉼없이 눈물을 닦으며 걷는다. 행여 누군가가 “하이, 미자.”라고 외치면 손 하나 번쩍 들고, “하이. 부엔까미노."
혼자여서 좋았지만, 혼자여서 불편하기도.
까미노 길을 걷는 데는 혼자임이 좋다. 혼자서 자연과 친구가 되고, 밀려오고 가는 숱한 기억들을 되 짚어 보기도 하고,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놓으며 내 기억의 모든 이름들을 불러 보기도 하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로움,
그래서 혼자가 좋다. 하지만 때로 좋음이 불편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오늘, 초록의 밀밭과 빨간 양귀비가 휘드러진
들판에서 혼자 전전긍긍하던 스페인 아줌마, 나는 그의 천사가 되어 줬다. 혼자서 카메라로 셀카를 이리저리 찍고 있던
그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찍어주겠다니까 얼른 카메라를 내게 내민다. 몇 개의 포즈를 취하며 찍어달란다.
스페인 카타고니아에서 일주일 휴가를 받고 왔단다. 어찌나 단단하고, 씩씩하던지. 답례로 날 찍어 준단다. 사양하자,
쏜살같이 달려 간다. ‘저 사람은 내 열흘 걸음으로 일주일 가고도 남겠다.' 그 건강함이 부럽다.
비아나는 작은 마을, 성당은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두 명의 한국 아저씨를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말이 없는 한 아저씨,
서글서글하고 친화력이 있던 아저씨, 그래도 오랜 만에 만나는 한국 사람이라 반갑다. 캐롤 모자도 다시 만났다.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걷고 있었답니다.
성당을 다녀왔다. 미사 후 순례자들을 위한 강복과 기도를 해 준다. 그 강복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길을 걷는다는 믿음,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이 없어진다.
회색의 하늘이 내일도 날씨는 흐릴 모양이다.
스페인 시골에선 아멕스 카드를 쓸 수 없어요.
며칠째 끌고 온 고민이 해결이 됐다. 큰 돈이 필요하면 신용카드로, 일상 필요한 돈은 환전한 유로를 사용하자 했는데,
내가 갖고 온 카드는 이 곳에서 사용 할 수가 없다. 필요할 경우 신용카드로 돈을 인출할 것이라던 내 계획이 무너졌다.
만일을 위해 어디선가 돈을 준비해야한다, 이 며칠째 끌고 온 숙제다. 머리 회전이 빠른 서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
수소문 끝에 그 친구의 친구 아들이 나와 비슷한 시점에 까미노 길을 걷고 있단다. 내일 그 아들이 로그리뇨에 도착한단다.
그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며칠째 끌고 온 숙제를 당신은 풀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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