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곱째 날 (5월 6일 월) 오바노스 - 발라뚜에르따 20.5km
아침 6시.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잤다. 상쾌한 아침이다. 기본 일정대로라면 오늘은 에스테야까지 걷는 날이다. 하지만 어제 알베르게 주인 아저씨는 에스테야는 팜플로나 만큼이나 복잡한 곳이고 알베르게도 너무 오래되어 환경이 좋지 않으니 쾌적하고 조용한 빌라뚜에르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로 그곳까지 걷기로 했다. 눈부시게 떠 오른 아침 햇살 속에 성당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어제 오후의 중후하고 가라앉았던 모습보다 빛을 받은 모습이 생기가 돈다. 오바노스를 떠나던 길가엔 양귀비가 휘드러지게 피어있다. 캐롤과 오바마를 빼 닮은 아들은 우리 앞에서 출발, 사진 찍기를 즐겨하는 알리는 열심히 인증 샷을 챙긴다. 아마 알리와 헤어지면 더 이상 내 사진은 찍힐 일이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혼자 찍기 미안해 나를 잡아다 세워놓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 하늘은 티 없이 푸르고, 오바노스 언덕을 내려와 접어 든 들길엔 귀하던 양귀비가 꽃밭을 이루며 선홍의 빛으로 손짓 한다. 걸음이 빠른 일행은 앞서 갔고, 내 보폭에 맞추며 숨을 고르고, 어젯밤 꿈에도 어김없이 내 앞에 왔던 그 인연들을 만난다. 행여 작은 앙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나는 손길을 내밀어 화해를 청한다. 때론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또는 눈부신 햇살과 함께, 나는 그들을 기억하고, 돌아가 그 시간을 바라본다. 까미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과 내 지나간 시간들과의 만남, 이 길에서 나는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화해를 배운다. 푸른 들길 끝자락엔 고도의 멋을 간직한 프엔테 라 레이나가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다. 광장이 나타나고, 좁고 긴 마을 골목을 빠져너오며 다시 들과 언덕으로 이어진다. 일행은 자꾸만 내 옆으로 지나가고, 행여 길을 노칠세라 앞 사람들과의 간격을 보며 뒤를 따른다. 내 걸음 수준에 맞는 아버지와 아들, 내 앞을 간다. 언듯 들은 바로라면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인 것 같다. 천천히 걷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땀을 닦으며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알리를 만난 건 10km를 걷고 도착한 마을 키로끼, 많이 덥다. 조금 지치고 있는 것 같다. 마을은 황폐하고, 우리나라의 달동네를 연상케 한다. 모든 까미노길이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 마을은 아니다. 알리와 샌드위치와 맥주 한잔을 시켜 놓고 땀을 식힌다. 정오를 넘기며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스페인의 햇빛은 숨쉬기에도 힘에 겹다. 이럴 땐 함께 걷는 옆 사람도 부담스럽다. 모두를 앞세우고, 최대한 천천히 걷는다. 왜 왔니? 왜 걷고 있니? 자꾸만 되 물어본다. 살고 싶었어. 그저 주어지는 시간이니 사는 것, 타성에 젖어 사는 것,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어. 진정으로 내가 살고 싶었어. 이 길을 찾았던 것, 그것도 또 하나의 내가 선택하고 싶은 삶의 도전이었어. 땀이 비오듯 흐른다. 정말 덥다.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니? 과연 너는 이 길을 감당할 수 있겠니? 멈추지 마. 포기하지 마. 서두르지 말고, 비교하지 마. 네가 할 수 있을 만큼만 해. “엄마, 나 이렇게 조금씩 먹으면 이제 살 수 있지?” “어머니, 저 이렇게 한 발씩 걸으면 되지요?” 아득하게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뜨겁게 떨어지는 땀방울이 소리를 지운다. 노르카 마을 도착, 이제 5km만 더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이다. 일정의 끝자락은 언제나 힘겹다. 크리덴셜 카드에 도장을 받고, 쥬스 한잔으로 목을 축인다.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바의 젊은 청년,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정확한 발음에 놀라 누가 너에게 그렇게 완벽한 한국말을 배워 줬느냐 묻자, 3개월간 한국을 여행 한 적이 있단다. 막걸리에 반해서 한 달, 소주에 반해서 한 달, 김치에 반해서 한달, 그러고 보니 석달이 가더란다. 청년은 유쾌했고, 편안했다. ‘부엔까미노’ 인사를 받으며 또다시 걷던 뙤약볕 아래, “아, 김치 먹고 싶어요.”라던 청년의 티없는 웃음이 떠 오른다. 행복해 지고 싶다고? 그건 멀리 있는 게 아니잖아. 도착한 숙소는 고풍스럽지만 깨끗하고 현대적 시설을 갖춘 아늑한 곳이다. 알베르게 봉사자는 불편 없이 영어를 사용했고, 인터넷이 가능했다. 전망 좋은 이층으로 올라가 두 사람의 침대가 놓여있는 방을 배정 받았다. 건물 뒷마당은 넓은 빨래터와 빨래 줄이 걸려 있다. 덜 마른 빨래들을 널고, 멋진 돌다리가 있는 마을 강가로 산책을 나간다, 거리는 유령도시처럼 조용하다. 이천년 전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 성인이 전도여행으로 걸었다던 이 길, 세월이 흐르고, 이런 저런 신앙의 얘기들은 전설처럼 이 길에 묻어나고 어느 날, 신심깊은 수도자들에 의해 또는 신자들에 의해 고행으로 이어지는 순례길이 됐을 까미노 길, 이 땅의 어느 한 귀퉁이에 내 발을 놓고 있다니, 분명 나는 선택된 사람의 하나 인지도 모르겠다. 강가에 커다란 개를 끌고 산책 나온 멋진 아가씨가 렌즈에 잡힌다. 과거와 현재, 시공을 초월한 공기가 내 주위를 떠돈다. 이곳 알베르게는 저녁식사와 아침도 준비가 된단다. 먹을 것을 찾아 식당으로 가는 것보다는 편하다. 음식을 장만해 주는 (물론 식사비는 당연히 지불하지만) 곳은 대개는 사설 알베르게이고, 비용이 조금 비싼 대신 시설은 잘 갖춰져 있고 쾌적하다. 어제 오바노스에서 추천을 잘 해 준 것 같다. 오늘 우리의 저녁 식탁에는 덴마크에서 온 자매가 함께 했다. 몸이 불편한 동생과 함께 떠난 언니, 얼마나 극진히 동생을 챙기던지. 언니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하던,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굼뜨던 동생. 자매의 모습은 영화 속 어느 왕족 같은 기품을 갖고 있다. 까미노 길을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토록 원하던 이 길을 동생과 함께 걸을 수 있어 행복하다는 언니의 모습이 감동스러웠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선물처럼 매일 만나고 있다.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티아고 순례길-아홉번째 날 (0) | 2013.09.01 |
---|---|
산티아고 순례길-여덟번쩨 날 (0) | 2013.08.20 |
산티아고 순례길-여섯째 날 (0) | 2013.08.14 |
산티아고 순례길-다섯째 날 (0) | 2013.08.07 |
산티아고 순례길-넷째날 (0) | 2013.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