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여섯째 날

sunking 2013. 8. 14. 10:09

 

길 떠나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잠이 안온다고 궁시렁대던 어젯밤, 언제 잠이 들었던가? 눈을 뜨니
새벽이다. 층계 옆 공간으로 옮겨 몸을 푸는 간단한 운동을 한다. 여기저기서 한두 사람씩 올라와 몸들을 푼다.
이만한 공간을 만나기도 처음이다.

머무를 마을 때문에 룸메이트와 싱갱이.
아침 7시 오늘은 오바노스를 향한 21km의 길이다.
오바노스까지 걷느냐 아니면 그 다음 마을인 프엔테 라 레이나 (생장에서 나눠준 표준 걷기의 마을)까지 걷느냐
때문에 알리와 싱갱이를 했다. 프엔테 라 레이나까지 걷는다면 25km, 조금 무리한 것 같으니 오바노스를 가자는
내 말에 별로 기분이 안 좋았던 가 보다. 물론 무리하게 걷지 않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오바노스란 마을은 이미
내 수첩에 찍어 놓고 온 머물러야 할 예쁜 마을 중 하나였다.


까미노 길은 내게 자서전을 쓰게 할 모양이야
날씨는 맑고 청명하다.
며칠째, 내 꿈 속엔 나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출연을 한다. 어쩌면 이 까미노 길은, 내게 길고 긴 자서전을 쓰게
할지도 모르겠다. 옛날 엄마가 말씀 하셨지. “내가 산 세월 엮어봐라. 책이 열권이라도 모자랄 거다.” 누군들 나름의
삶의 사연들이 없을까. 덮고 누르고, 흘려 보내고. 그래서 모두의 가슴엔 켜켜이 무지개 떡이 만들어져 있을지도 몰라.
아니, 누군가의 가슴엔 하얀 재만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바라보노라면 까닭없이 항상
마음이 아프다.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그 흔적들을 보고 싶어, 나는 이 길을 시작했는지도 몰라. 그런데 왜 꿈까지 그리도 선명히 나의
인연들을 데려다 놓고 있을까.

새들의 노래소리는  내게 속삭이는 친구의 얘기소리.
“얘들아, 너희들은 알지? 나, 다 잊고 싶은데, 왜 꿈에서까지 나오니? 다 잊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 마음은 가볍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단 말야.‘
“괜찮아. 어떻게 그렇게 삶의 흔적을 지우니? 여긴 네가 원했던 순례 길이잖아. 무슨 의미가 있을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야고보 성인을 기리는 순례길이란건만 잊지마”
새들에게 안부를 그리고 나의 하루를 노래하는 새들과 어울려 쏟아낸다. 용케도 새들은 내 마음을 읽어준다. 알 리가 물었다.
“새들과 어쩌면 그렇게 재미있게 얘길하니?”
“너도 해 봐. 새들이 알아듣거든.” 킬킬대며 웃다가 걸음이 빠른 알리를 앞장세워 보낸다.







팜플로나에서 오바노스 가는 길은 천국의 문턱
팜플로나를 벗어나며 끝없이 이어지던 푸른 밀밭 길을 걷는다. 노란 유화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끝도 없이 펼쳐지던 유채
밭. 주비리를 들어서며 봤던 그 요염한 선홍의 양귀비가 제법 밀 밭 사이에 자주 눈에 띤다. 햇빛은 머리 위에서 강렬하게
비추고, 멀리 언덕 위에 풍차가 돌아간다. 태양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까미노 협회 사무실에서 나눠준 자료에 꽤 가파른
등고선이 그려진 오늘의 길이다. 산길과 계곡이 깊겠다는 우려와는 달리 약간의 인내를 필요로 하는 오르막길이다.
평지에서 나는 항상 거북이다. 이 거북이가 오르막이 나오면 앞장이다. 아마 한국의 산야에 익숙하게 단련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법 날쌘 돌이처럼 앞장을 서던 알리도 언덕만 나오면 꼬리를 내리며 뒤 처진다. 많은 외국 친구들이 그랬다.


                                        순례길은 이렇게 고난의 길이야 - 피에레 델 페르돈의 조형물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던 언덕. 피에레 델 페르돈 (일명 용서의 산).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던 순례자들이 쉬어 가는 언덕위의 쉼터. 그곳엔 순례자들의 형상이 조형물로 만들어져 세워져
있다. 이런저런 갖가지 형상이 만들어져 순례길의 노고가 어떤 것인지 형상화 되어 있다. 순례자들은 삼삼오오 구룹이
되어 인증샷을 찍느라 시끌법석이다. 그 가파른 언덕까지 과일이며 음료수를 들고 팔러 온 아저씨도 있었지만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의 배낭엔 필요한 만큼의 준비가 된 상태. 별로 장사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질 않다. 나만해도 저 아랫
마을에서 빵과 과일을 준비했으니 더 짐을 늘릴 수도 없고, 괜스리 그 아저씨의 노고가 짠하다.







시원한 바람에 땀도 숨을 죽였겠다, 다시 걷기 시작, 가파르게 오른 만큼 가파르게 내리막 길이다.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하얀 바람꽃 꽃밭, 그 정경이 너무 아름다워 발을 멈춘다. 꽃밭 사이에 꽃들과 나란히 앉는다. 꿈을 꾸고
있나보다. ‘부엔 까미노르’를 외치며 손을 흔들고 간다. 얼마를 앉았었을까. 가야 할 길로 다시 접는다. 천국의
정원은 몇 컷의 사진으로 담는다. 사진 속에 이 황홀한 기쁨과 넘치는 감사가 담길 수 있을까 몰라.

걸을만큼 걸었는대도 오바노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얘들아, 나 힘들을라고 그래”
“걱정하지마, 천천히 가면 되.” 새들의 위로와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던지.
드디어 멀리 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오바노스는 고풍스럽고 경건한 작은 시골 마을







오바노스는 고풍스럽고, 깨끗한, 뭔가 신성한 느낌을 주던 작은 마을, 마을 규모에 비해 중후한 고딕양식의 성당은
매우 아름다웠다. 마당이 딸린 알베르게는 성당과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위치했으며 가정집같이 아늑했고, 편안하다,
지치도록 뜨겁던 오후의 그 태양도 언제였더라 까맣게 잊고 정원 그늘에 앉아 바람을 즐긴다. 오늘은 참 여유롭고
한가하다. 수첩을 들고 나가 밀린 일기를 정리한다.







아름다운 동행 - 백인 엄마와 흑인아들의 순례
오늘은 일요일, 열려있는 식당은 오직 한군데, 순례자들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내 앞엔 흑인 혼혈 청년과 나이가
든 백인 여자가 함께 앉아 있다. 오늘 걸었던 길에 대해, 내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흑인 청년은 아주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설명을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는 케롤이라는 여자에게 “너 안내하는 가이드니?”라고 묻자 웃으면서 “내 아들”이라고 말한다.
맙소사. 이런 실례가 있나. 또 실수네. 너무 정중하고 너무 예의 바른 그 젊은이를 나는 산티아고 길의 전문적인 가이드로
착각을 했던 것. 전문적인 산티아고의 안내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기에. 오바마를 꼭 빼 닮은 그 아들은 휴가를
이용해 엄마와 10일간만 걷기로 하고 함께 떠나온 길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동행? 교양과 기품을 갖춘 엄마와 잘 자란 그
아들을 보며 멋진 얘기 하나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들은 로그로뇨에서 돌아갈 것이고 엄마는 완주할
계획이란다. 작은 마을에서의 귀한 인연들, 모두가 이 길에선 친구가 되고 국경 없는 이웃이 된다. 꽤 늦게까지 즐겁운
시간이었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티아고 순례길-여덟번쩨 날  (0) 2013.08.20
산티아고 순례길-일곱째 날  (0) 2013.08.14
산티아고 순례길-다섯째 날  (0) 2013.08.07
산티아고 순례길-넷째날  (0) 2013.08.07
산티아고 순례길-셋째날  (0) 2013.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