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 하루를 돌아보며
길을 걸으며 만나는 시골 성당
가장 짧은 길을 걸었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남긴 날,
나는 10km의 로그리뇨로, 룸메이트 알리는 23km의 나바레테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다른 까미노 길에 비해 가장 밋밋하고 특징없던 길,
행여나 실망할까 마지막 산길을 내려 오던 곳에 펼쳐졌던 하얀 마가렛과 선홍의 양귀비가 어우러졌던 꽃밭,
차마 발길 떼어지지 않아 꽃 바래기를 하며 한없이 서 있던 곳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그 어떤 마을 또는 도시보다 가장 마음에 들던 , 옛것과 오늘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던 곳,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찾던 알베르게,
안내자로 나선 당당하고 씩씩했던 한국인 아가씨에 의해 다시 한 번 나라는 존재에 대해 돌아봤던 시간,
유서 깊은 성당이 네 곳이나 있었고, 편리하게 그 성당들을 찾아 볼 수 있었던 곳,
로그리뇨의 대표적안 음식, 라우렐 골목의 타파즈 우 비노와의 만남,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지른 무안스러웠던 실수, 그 당혹감.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중요하고 기쁜 일은 나에게 부족한 여행비를 들고 와 전해 준 착한 대한 아들과의 만남.
오늘은 짧았지만 긴 날이었고,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던 날이었지만 그 작아짐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돌이켜
생각해 봤던 소중한 날 이기도 했다.
가장 필요한 생존의 기본은?
걸어야 하는 거리가 짧다는 것이 나를 느슨하게 해 놓는다. 매일아침 팽팽하게 감는 시계 태엽 처럼, 걸어야 할
20km 또는 24km의 거리는 나에게 심 호흡으로 시작 단추를 눌러 줬다. 하지만 10km, 그거야 일도 아니지.
어제 밤부터 우습게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피로가 슬금슬금 내 곁에 다가오는 건 웰 까?
“왜 어두워. 알리가 먼저 떠나서 그래? 괜찮아, 잘 할 수 있지?” 지지배배, 오늘도 새들은 내게 아침 인사를 한다.
아! 알았다. 왜 이렇게 힘이 빠지는지.
알베르게 문을 밀고 나오며 만났어야하는 커피 집이 오늘따라 눈에 띄지 않았어. 우유를 듬뿍 넣은 카페꼴라체
(내가 익힌 몇개의 스페인 말중 하나), 버터와 쨈을 몇겹으로 발라 먹는 토스트 한 쪽, 그것을 만나지 못한 것,
나를 지치게 했던 가 보다. 생존의 기본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 이유였어. 심리적인 이유가 아닌 생리적인 것.
명랑, 쾌활, 수선스런 스페인 아줌마
오는 길 내내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마을도, 눈길과 마음을 잡아끄는 고풍스런 성당도 없다. 지도대로라면
비아나에서 로그로뇨까지는 10km 구간엔 마을이 없다.
걷는 길 마지막 지점, 조그만 쉼터 같은 카페가 보인다. 아주 허름한 시골 집, 커피는 뒷전이고 우선 주문을 하며
볼 일이 급해 화장실을 찾았다. (까미노 길을 걸으며 만나는 바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화장실을 제공하는 곳 이기
도하다 - 화장실 이용 때문에 바에 들러 커피를 마실 때도 있다) 씩씩한 스페인 아줌마, 그 우렁차고 활달한
목소리로 외친다. 화장실이 왜 필요하냐. 이 주변이 온통 네가 필요한 화장실이 아니냐고. 몇몇 쉬고 있던 순례자들이
와그르르 웃는다. 나, 원, 이런 아줌마는 처음이고, 민망하고 창피하고. 주문해 놓은 커피니 마시긴 해야겠고, 태어나
먹어본 가장 맛없는 커피, 마시다 남기긴 생전 처음.
내가 왜 일본여자? - 크고 당당하고 걸음도 빠르고 목소리 큰 여자가 부러워
로그리뇨를 바라보며 갑자기 황홀한 꽃들판이 나타난다. 하얀 마가렛과 선홍의 양귀비,
마가렛이 본명인 선배와 후배 가 떠 오른다. 후득후득 빗방울이 굵어 지기 시작한다. 나무 아래에서 비옷을 챙기며
로그리뇨 관광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을 받아 쥔다. 오늘 들어갈 알베르게 위치에 대해서 설명도 듣는다. 문제는
지도에 대한 내 지각 능력은 빵점이란거다. 내가 이곳을 오며 지도책 하나 없이 왔던 건 준비성 없는 즉흥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지도를 놓고도 방향을 잡지 못한다는 거다. 분명 내가 찾는 알베르게에 동그라미 표시까지
해주며 설명한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길 한가운데서 왼쪽 오른쪽을 찾느라 헤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천사가 되는 이곳 어느 아저씨 날 데려다 준 것 까지는 고마웠지만 그곳은 시립알베르게일 뿐 내가 찾는 곳은 아니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씩씩하고 당당한 한국 아가씨, 약도를 보여주며 도와줄 수 있겠냐니까 “아, 한국 분이세요?
일본 분인줄 알았어요.” 기꺼이 약도를 들고 앞장서서 찾다가 실패, 한마디 하신다. “혼자 오셨어요?” 어쩌자고
대책없이란 뒷말은 입밖으론 나오진 않았지만, 그저 씁쓸하다. 마침 지나던 어느 스페인 청년 도와 주겠다고 앞장섰고,
아가씨는 그 청년에게 나를 인계 후 헤어졌다. 그래, 너도 나도 잘 모르니 조금 짜증은 났을거고, 앞으론 피차 어려운
상황이니 묻지 않을게. 갑자기 왜소하고, 당당하지 못한 내 모습에 위축이 된다. 나도 저런 아가씨처럼 씩씩했으면,
목소리도 크고, 말투도 빨라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왜 보는 사람마다 날더러 일본사람이냐고 그러지?
일본 거리에서 마주치던 작고, 조용하고, 깍듯했던 여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건 그런대로 좋은 이미지이고).
청년은 아주 쉽게 날 알베르게 앞까지 데려다 주고 갔다. 너무 고맙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맙습니다.”가 내가 쓰는 언어다.
라우렐 거리의 타파즈 우 비노
오늘은 시간이 넉넉하다. 숙소는 잘 찾았겠다, 시내도 구경하고, 점심도 먹어보자.
로그리뇨를 대표하는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상권이 형성된 곳, 거리는 깨끗하고, 완벽하게 구획정리 된 시가지는
고급스러웠다. 어느 책에선가 로그리뇨를 가거든 라우렐 골목의 타파즈 우 비노를 먹어보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난다.
물어 물어 라우렐 골목을 찾았다. 타파즈 우 비노(와인과 타파즈)를 파는 골목이다. 비는 잦아졌고, 두 개의 타파즈
집을 들러 시식을 했다. 타파즈에 곁들인 와인 한잔을 포함 2유로. 값도 저렴했지만 계란과 감자로, 멸치저림과
훈제햄으로 만든 것과 와인의 맛이 일품이다. 두 번째 집에선 분위기 있는 음악까지 틀어줘, 오전 내내 약간은 침울했던
기분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다. 잘 생긴 종업원,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니까 멋지게 웃어주며 포즈를 취한다. 이곳
사람들의 거리낌 없는 자연스러움이 좋다.
까미노길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시내 한 바퀴를 돌다 피레네 산에서 만났던 영국인 천사를 만났다. 마침 숙소로 들어 가던 뒷모습이 그녀다. 반가와
뛰어가 인사를, 잘 갈 수 있을까, 염려되던 사람, 이 곳에서 만난게 반가운가보다. 몇 번이고 잘 가고 있는 거지?
문제는 없지?를 되 묻는다. 나도 그들처럼 제스추어를 써 본다. 팔을 벌리고 약간은 어깨를 올리며 “네가 보기엔 어때?”
그녀도 활짝 웃는다. 이 길에선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알리는 오늘 나바레따로 가고 있겠지?
나도 이제부터 표정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아.
10km만 걷다 보니 하루가 길다. 시내도 돌아보고, 성당에 들러 미사시간도 확인하고, 그러고도 시간은 오후 4시.
마침 어느 아가씨가 외친다. 오늘 같이 돈을 모아서 저녁을 준비하잔다. 과일과 와인과 치즈, 빵을 사 올테니
원하는 사람은 5유로만 내란다. 특별한 계획도 없고, 나가기도 그렇고, 나도 5유로를 건네준다. 두 여자는
씩씩하게 장을 봐 오겠노라며 나간다. 밀린 일기 정리하고 몇가지 빨래도 하고 시간은 저녁 5시. 사람들이 모여있는
식당으로 (이 곳은 간단한 주방과 식탁, 한켠엔 소파가 있는 곳) 두명의 아가씨가 열심히 저녁을 준비한다. 야채와
과일로 샐러드를 만들고, 갓구운 바게뜨 빵을 자르고 있다. “내가 도울 일은 없어.?”라며 그들의 옆에 자리를 잡는다.
이상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한 아가씨, 옆에 같이 준비하던 언니같은 아가씨에게 속삭인다. “왜 저러는데, 날더러
도와 줄게 없냐고 그러는데.” 얼굴을 돌려 단호하게 한마디, “이 음식은 우리 둘이 먹을건데. 네 도움은 필요없어.”
순간 아차 싶었다. “미안해, 난 함께 식사를 하자는 그 아가씬 줄 알았지.”
남자들과 어울려 시끌법석이던 다른 테이블의 아가씨가 손을 흔들며 “나예요. 우리가 준비할께요.”라고 외쳐
창피함을 모면하긴 했지만, 그 민망함이라니, 새초롬한 동생과는 달리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언니가 한마디,
“같이 먹어도 되요.” 열흘간 걸으며 만났던 수 많은 순례자들의 얼굴 속에 아마 이 저녁에 만났던 저 얼굴만은
기억에서 지워내야 할 것 같다.
이럴 때 아무 일도 없던 듯 표정 관리를 좀 해야 하는데, 굳어진 얼굴이 펴 지질 않는다.
오늘은 네가 천사야
문자가 온다. 로그리뇨에서 만나기로 한 학생, 숙소까지 찾아와 부탁한 것을 전해주고 서둘러 돌아간다. 군대
제대한 아들이라 들었는데, 아직도 앳된 모습이 대학생이다. “건강 하시지요? 멋진 순례길 되세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더 준비 해 들릴께요.” 그래, 오늘은 네가 천사야.
새것과 옛것의 조화
비는 그쳤고, 하늘엔 구름 사이로 연한 노을빛이 예쁘다. 강변엔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고, 그 모습이
우리나라 탄천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민망함, 열등감, 창피함, 소외감등 오늘 하루의 안 좋은
기억들이 강변 산책 길 내내 나를 우울하게한다.
그래, 고만 잊고. 나는 가서 일러바칠 곳이 있잖아.
Redonda 대 성당의 미사, 미사 전 수녀님이 이끄는 묵주의 기도, 다리가 많이 불편했던 노 사제의 거룩한 모습,
연령층이 높은 신심 깊은 신자들의 모습이 더없이 경건하다. 미사 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던 성 발톨로메오
이그레시아 성당으로 가자, 그곳의 사제는 혈기 왕성한 젊은 사제. 노사제의 예절이 거룩하고 경건했다면 봄날의
미풍같던 미성으로 성가를 부르던 젊은 사제의 예절은 아름다웠다. 한시간 동안 두 사제의 예절을 연극 관람하듯
앉아 있던 시간, 로그리뇨가 줬던 축복의 시간. 도시에서 느낀 새것과 옛것의 조화로움처럼, 노사제와 젊은 사제가
전해줬던 세월의 빛, 다시한번 세월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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