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여행지

미얀마 리포트3

sunking 2012. 12. 31. 22:39

 

  미얀마 Report 3            

          

   미얀마의 고대 역사와 왕조 시대   

    - 고대 BC 5세기 ~ AD 11세기 중반

    - 파간 왕조 1056년~1287년

    - 몽골의 침공과 분열 1287년~1531년

    - 퉁구 왕조1531년~1752년

    - 콘바웅 왕조 1758년~1886년

 

    미얀마의 식민지 시대와 사회주의 시대

    - 영국·일본 식민지 시대 1886년~1948년

    - 버마 독립과 우누의 사회주의 1948년~1962년 

    - 버마식 사회주의 1962년~1988년

 

    미얀마의 군사 정부 시대와 민선 정부 출범

    - 민주화 운동과 군사 정부의 등장 1988년~2002년

    - 군사 정부의 민주화 7단계 로드맵 추진 2003년~2011년 3월       미얀마종족(사진 상) 미얀마에 주둔한 영국군

 

    영국·일본 식민지 시대 1886년~1948년  

    콘바웅 Konbaung왕조의 세력 확장은 결과적으로 당시

    인도 내 영국 세력과 충돌을 가져왔다.

    제1차 전쟁1824년~1826년 제2차 전쟁 1852년

     제3차 전쟁1885년을 겪은 뒤 콘바웅왕조는 결국

    패망하였고 1886년 영국령 인도에 편입되었다.

    1937년 4월 영국 의회가 개정 버마통치법을 통과

   시킴에 따라 버마는 인도에서 분리되어

    직활식민지와 자치령의 중간적 법적 지위를 획득하였다.

                                                                                                    미얀마 진격한 일본군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버마에 남기관南機關을 설치하여

    아웅 산 Aung San장군을 중심으로 한 ‘30인의 동지’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버마 독립의용군을 조직하여 1942년 3월 양곤Yangon을 점령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연합군에 항복할 때까지 일본은 버마를 지배하였다.

    버마 독립을 위해 영국군 및 일본군과 무장 투쟁을 벌여 국민적 영웅이 된 아웅 산 장군은

    1947년 7월 각료회의 도중 암살되었다. 이후 우누U Nu가 버마 임시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1947년 12월 영국 의회는 ‘버마 독립 법안’을 가결하였고, 독립 기반이 형성되었다.

 

    버마 독립과 우누의 사회주의 1948년~1962년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버마는 영국 연방에서도 탈퇴하였다. 우누U Nu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 AFPFL-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이 집권해 대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대외적으로는 엄정 중립주의를 표방하였다. 우누 총리는 1962년 3월 네윈 Ne Win

    총사령관의 쿠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0여년간 재임하면서 신생 국가의 기반을

    닦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소수민족의 반란에 따른 내전 등으로 집권 기간 중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버마식 사회주의 1962년~1988년

    1962년 3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Ne Win은 1963년 1월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적 정신 가치를

    접목시킨 이론인 ‘인간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발표하여 ‘버마식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 이념을

    정립하였다. 버마식 사회주의 개혁 작업의 핵심은 국유화 추진이었다.

    그러나 생산·서비스 등 전 경제 분야에 걸친 국유화 추진은 기업 운영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민간 부문의 활력 감소를 초래해 경제 침체 현상이 지속되었고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을 강제 진압하는 군인들(좌) 미얀마를 통치하는 군부회의(우)

 

    1981년 11월 네윈 대통령은 건강 악화와 국민들의 평화적 정권 교체 열망으로 우산유U San Yu 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당 의장직만 보유하였다. 그러나 네윈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으로 계속

    실권을 장악해 왔다. 1981년 소몽 장군에 의한 쿠데타로 반정부운동 세력이 제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아웅산 수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 등에 따른 국민적 불만은 1988년 3월부터 수개월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유발하였고, 군인과 민간인의 충돌로 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엇으며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네윈은 1988년 7월 사임하였다.

 

   [현재]

    1992년 4월 집권한 탄쉐(Than Shwe) 국가평화발전위원회 의장이 장기정권하고 있으며,

    2008년 5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외적으로 중도중립을 표방하며, 1948년 유엔에, 1992년에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순수 비동맹

    엄정중립주의를 기조로 독립자주외교를 추진하고 있다.

    초강대국에 대한 불신감으로 미국·소련(지금의 러시아)과의 관계는 일정거리를 유지한 반면,

    지정학적 이유로 대중관계를 최고의 외교문제로 중요시해 왔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적은 일본·서독·오스트레일리아 등과의 실질관계를 확대하고 있고,

    동구권과의 협력관계도 유지해 왔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는 1961년 8월 미얀마와 영사관계를 수립하였고, 1962년 9월 총영사관을 개설하였다.

    1975년 5월 16일 정식으로 수교하였으며, 2007년 현재 상주 대사가 주재하고 있다.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공식방문한 적이 있으나 아웅산 암살폭발사건이 일어나

    우리나라 정부요인이 희생당한 적이 있다.

  

1983년 아웅산 묘역 암살폭발로 희생된 대한민국 정부각료와 폭파된 현장

    양국은 1964년 6월에 무역 협정, 1972년 1월에 뉴스교환 협정, 1978년 1월 항공운수 협정,

    2002년 2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2006년 9월에 항공 협정을 체결하였다.

    우리나라의 對 미얀마 수출액은 2008년 현재 2억 9198만 달러로 주종목은 직물·기계류·목재 등이고,

    수입액은 8068만 달러로 주종목은 원목과 철광 등이다.

    1981년 현대건설이 7500만 달러 상당의 미얀마 최대의 댐공사를 수주한 이래 우리나라 기업의

    미얀마 진출이 활발해졌으며,  현재 삼성, LG, (주)대우, 현대종합상사, 효성, 세계물산 등 200여개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2,000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국대사관은 양곤시내 미대사관 건너편에 있다.

 

    양국의 문화교류로는 1983년 10월 우리나라 민속예술단의 미얀마 방문공연이 있었고,

    1985년 2월 우리나라 상무(尙武) 축구단의 방문 친선경기와 1986년 3월 우리나라 태권도

    시범단의 방문행사 등이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에는 7명의 미얀마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10년도부터 K-POP의 영향으로 한국문화라고 하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별도의 설명을 첨언하겠다.

   

국빈 방문한 떼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과 정부긱료 25인이 STX조선 진해조선소를 방문(좌) 아웅산 수치여사(우)

 

   [북한과의 관계]

    북한은 1975년 5월 16일 미얀마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아웅산 암살폭발사건 이후 미얀마 정부가 1983년 11월 북한 정부 승인을 취소하고

    공관원의 철수를 요구함에 따라 1983년 11월 4일 양측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2007년 4월 26일 국교가 재개되어 2007년 현재 상주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양측은 1977년 9월에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기본협정, 1978년 2월에 항공운수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1983년 미얀마의 대북한 단교 이후 모두 폐기되었고,

    2007년 4월에 불교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대사관 주재원들과 소수의 체류자들은 평양식당

    인근에 몰려 살고 있으나 교민들과 내왕은 전무하고 가끔 대한민국 사업가들이 음식 맛을 보기

    위해 둘러 보는 정도. 북한의 김태희라는 여인이 홀써빙을 맡고 있다고 해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지만 현지 가이드들이 기피하는 코스 중에 하나다.

 

    우리 일행들도 그곳에 가보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나는 단호하게 반대....결국 안갔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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