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야붕/코붕 親分/子分
제도 비슷한 친족관계의 일종으로 실제 친자관계와는 별도로 가족집단 밖에서 맺어지는
친자관계와 비슷한 사회관계를 가리키는 말인데 양자에 의한 친자관계와 결혼으로 만들어지는 부부와
그의 부모와 맺어지는 친자관계와는 구별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사회적 지위의 상하에 근거하는 전인적인 비호·봉사관계가 인정되는 점이 특징이다.
전통적인 부락사회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지금까지 민속학이나 사회학에서 많은 연구업적이 있는데
현대 도시사회에서도 직인(職人)들의 오야카타(親方)제도나 야쿠자 혹은
흥행 판매집단[코오구시(香具師)·야시(野師)] 등의 오야붕·코붕 관계가 일반적인 이미지로 두드러진다.
〈가족적 경영〉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의 기업사회를 생각하면 간접적이긴 하지만
이 원리는 현대 일본문화의 기층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야쿠자
원래 야쿠자(八九三)는 카드놀이의 일종인 삼마이(三枚)라는 커브도박에서 유래한다.
이 카드놀이는 3장의 패가 합해서 10이 되거나 20이 되면 무득점이 된다.
〈8·9·3〉의 조합이 20으로 무득점이 되기 때문에 이 무득점의 조합을 야쿠자라고 부른 것이 시초이다.
그 의미가 원용되어 쓸모없는 것이나 가치가 없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건달이나 노름꾼 등 불한당(不汗党)을 의미하게 되었다.
야쿠자의 기원은 16세기 전국(戦国) 시대 말기로, 하극상 시대에 등장했던 농민 출신의 용병들이다.
도박판을 관장하거나, 노동력 알선 등의 일을 하던 이들은 중앙정부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하층사회에서 일정한 권력을 유지했다. 메이지유신 전후의 혼란기에는 번(藩)이나 정부에 협력하여
미성숙 단계의 정치적 권력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중앙권력의 입장에서 야쿠자 집단의
전투력·실전경험·동원력·단결력은 매력적인 이용대상이었던 것이다.
근대의 야쿠자는 산업화의 창구인 항구에서 태어났다. 1900년 전후, 와카마츠항(若松港)에서
부두 노동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의사(擬似)가족적 노동조합이 그 원형이고,
점차 그것이 코오베·오오사카·요코하마 등지로 확산된다.
거의가 피차별 계급 출신(부락민과 일부 조선인 포함)인 그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받은 일당으로 도박판을 벌였고,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사회 저변부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이해관계와 갈등에 개입하여 그것을 조정하고 대가를 받았다.
야쿠자가 주력업종인 노동력 공급업 다음으로 진출한 분야는
연예 종사자를 상대로 한 연예 흥행업이었다. 근대 초기에 일반대중에게 개방된 공연장은
건달이나 주정꾼이 모이는 소란스럽고 위험한 공간이었다.
야쿠자는 이곳의 치안 관리인이 되어 안전한 일반 공연을 보장해주는 대신 공연 수익의 일부를 취했다.
사회구조·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라 야쿠자는 당초의 공동사회형 조직에서
점차 이익사회형 조직으로 변모해갔다. 자기지역의 범주를 넘어 광역화함에 따라
당연히 토착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했으며 이것이 야쿠자에 대한 사회적 제재의 강화로 이어지게 된다.
흔히 야쿠자는 불법폭력조직으로 비도덕의 대명사이지만 전국 각지에 수백 개의 사무소를 둔
일본최대의 폭력조직 야마구치 구미(山口組)는 전성기인 1963년에는 18만4천명의 조직원을 거느렸었다.
당시 이는 일본의 자위대원보다 많은 숫자이며 그때 제3대 조장이던 타오카 카즈오는
코오베 경찰서의 〈1일 서장〉을 하기도 했다.
합리적이고 치밀하며 동양권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고 참혹한 패전을
대번에 극복한 선진국인 일본이라는 나라의 외양이 양화(陽画)라면,
음습한 관행과 묵계와 익명 등으로 이루어지는 내부 일본의 치부가 비쭉 드러난
야쿠자라는 존재는 음화(陰画)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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