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인문학

일본인들의 문화 2 - 무사도武士道

sunking 2018. 4. 8. 16:24

무사도〈부시도오〉武士道

    


일본인의 사생관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불교였다.

죠오도슈우(浄土宗)는 「엔리 에도(厭離穢土) 공구 죠오도(欣求浄土)」라고 해서

더럽혀진 이 세상을 떠나 극락정토에서 환생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또한 젠슈우(禅宗)의 일파인 소오토오슈우(曹洞宗)의 일본 개조(開祖)인 도오겡(道元)은

그의 저서 『쇼오보오 겐조오(正法眼蔵)』에서 〈삶과 죽음을 삶과 죽음에 맡긴다〉며

생사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죽을 때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죽음에 철저하고,

살아 있을 때는 삶에 철저해서 한순간 한순간에 전력을 다하여 살아갈 것을 역설해

카마쿠라 시대 이후에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무사들에게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서 관료화된 무사들의 복고의 움직임으로 활발하게 〈무사도〉가 대두되었다.

에도 중기에 큐우슈우(九州) 사가항(佐賀藩)에서 만든 무사의 언행비평서인

『하가쿠레(葉隠) 1716년』에서는 〈무사도라는 것은 죽는 일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젠슈우의 말을 한 걸음 더 강조해서 죽음에 철저한 것이

완전한 삶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더 현현화시키고 이미지화시키며 비주얼화하고 의식화시킨 것이

무사도에서 말하는 〈셉푸쿠(切腹)〉이고 이를 통해 장렬하게 죽는 것을 연출하고

자기자신과 가문의 이름을 살리면서 유족에 대한 보장을 얻어낸다.

이것이 바로 셉푸쿠라는 의례이고 또한 제도이다.

 

무사도와 죽음의 미학

• 『츄우싱구라(忠臣蔵)』의 무사도와 죽음의 미학

종래에 카부키나 인형극의 인기공연목록이었던 『츄우싱구라(忠臣蔵)』는

최근에 새해 초가 되면 TV 드라마로 방영되는 등 최고의 흥행카드이며 성공보증수표인

아타리 쿄오겡(当たり狂言)으로 인기가 높다. 이것은 300여년전에 주군을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무사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큰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을 제재로 한 카부키나 죠오루리(淨瑠璃)로 상연되곤 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막부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이었므로 이것을 극화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47년 후에 『카나데혼 츄우싱구라(仮名手本忠臣蔵)』라는 사건을

패러디한 극으로 상연되기 시작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전혀 풍화되지 않고 인기를 끄는 이유는 흥행 보증수표 [도쿠진 토오(独參湯)]이기 때문에

좋은 배우를 쓸 수 있고 좋은 배우를 쓰기 때문에 인기를 이어가는 측면도 있지만

주군에 대해서 의리를 다해 목숨을 바쳤던 사건의 본질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묘지가 있는 토오쿄오 미나토구(港区) 타카나와(高輪)의 셍가쿠지(泉岳寺)에는

일년내내 향불을 피우며 추도하는 추모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01년 3월 14일에 에도막부의

신년 하례식에 천황의 칙사를 대접하는 중책을 맡은 지방 아코오번(赤穂藩)의 소영주인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内匠頭)는 이 방면의 전문가인 키라 코오즈노스케(吉良上野介)라는

영주로부터 지도를 받게 되는데 고지식한 그는 관행처럼 되어 있는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가(다른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뇌물은 그중의 하나이다)

키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듣게 된다.

그러자 막부의 최고책임자인 쇼오궁(将軍)이 거처하는 에도성의 마츠노 다이로오카(松の大廊下)라는

복도에서 칼을 꺼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을 깨고 칼을 뽑아 키라의 이마와 오른쪽 등에

상처를 입히는 일을 저지른다. 그 자리에서 체포당한 아사노는 사건당일에 할복을 강요받는다.

결국 그는 막부의 법에 따라 영토를 몰수당하고 할복한다.

 

이에 비해 키라는 무죄로 전혀 처벌을 받지 않는다.

졸지에 주군을 잃은 아코오번의 아사노 수하인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内蔵助) 이하 47명의 무사는

그 후 겉으로는 술주정뱅이나 미치광이처럼 처신하여 그들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 극비리에 주군의 복수극을 향해 매진한다.

이듬해 마침내 폭설이 내리는 12월 14일에 삼엄한 경계를 뚫고

주군 할복의 원인을 제공했던 키라를 참살하고 그의 목을 주군의 무덤 앞에 바친다.

당시에 이것은 의거로 받아들여져 막부의 고위관리까지 구명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불가항력으로 법에 따라 모두 할복하게 된다. 47명의 무사 중에는 오오이시의 16세 된 아들도 있었다


                                                           47인의 무사 츄신구라(忠臣藏) 중애서 


츄우싱구라(忠臣蔵)가 법적으로 따진다면 한낱 에도성에서의 다이묘오들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되고

이어지는 집단 복수극이고 생명을 경시하는 만행의 연속이며 현대의 법 감각에서 본다면

살인죄에 주거 침입죄·소요죄·협박죄·건조물, 기물 파손죄·흉기준비 집합죄·사체유기죄가

적용되는 데다가 폭력단의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처벌이 가중되는 죄목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일본인이 열광하는 것은 법과 따로 존재하는 정의가 그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정의가 이끌어낸 완벽한 형식미일 것이다.

억울한 주군을 위해서 철저하게 자신을 소모해버리고 장렬하고 완벽하게 산화하는 행위를

일본인은 티 하나 없는 명품도자기 작품을 대하듯이 그 사건을 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일본인의 장인정신을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바로 이 장인정신이 완벽하고

치열하게 아름다운 집단의 죽음을 주조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여기서 무사들은 아름다운 할복에 동원된 소도구들일 뿐이다.

 

• 『아베 일족(阿部一族)』을 통해서 보는 무사죽음의 가치관

일본 근대작가의 거두인 고답파 모리 오오가이(森鷗外)의 『아베 일족(阿部一族)』에도

무사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등장한다. 지방 영주의 주군이 죽자, 측근 무사들이

 전부 순사[쥰시(殉死)]를 허락받아 할복하는데 아베라는 무사만은 그 대열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아베는 분노와 수치를 느꼈지만 허락 없이 순사하는 것은

모반[무홍(謀叛)]으로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결국에는 궁리 끝에 할복하고 전 영주의 명복을 빌기로 하지만

이것이 영주 집안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급기야는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영주와 아베의 집안싸움으로 번지고 끝내

아베 일가는 전원이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무사의 죽음이 의리와 정의와 완벽한 매너로 미학으로까지 칭송되고 있지만

인간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체계에서 본다면

병적인 도착과 편집적인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무사의 다양한 죽음형태를 미풍양속으로까지 받아들이던 과거 에도 시대의

집단적인 망상이자 병적인 모순을 군의관 작가인 모리 오오가이는

면도날 같은 시선으로 해부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외과 수술적인 이 작품은 당시 왜곡된 관념이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