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인문학

일본인들의 문화 3 - 엥카演歌

sunking 2018. 4. 8. 16:41

엥카演歌

    

일본 대중음악의 한 분야. 이 엥카는 자유 민권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민권가요가 기원이었는데

1888년 히사다 오니이시(久田鬼石)가 엥카 장사단[엥카 소오시당(演歌壮士団)]을 결성할 무렵부터

노래에 의한 연설이라는 의미에서 연가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장사가[소오시카(壮士歌)]라고도 불리었다.

여기서 장사라는 의미는 신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두나 연극소극장에서 산발적으로 호소한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그들은 울부짖는 듯한 노래를 했다.

그들 작사 작곡의 〈다이너마이트 부시〉는 토사(土佐)의 속요와 학교 창가[쇼오카(唱歌)]의 특징을

겸비하고 있었고 그 노래를 모태로 해서 〈유카이 부시(愉快節)〉·〈킴부 부시(欣舞節)〉 등의

가사를 바꾼 노래가 등장했다. 또한 국회개설이나 청일전쟁의 시사문제를 풍자한 가사가 히트했으며

1900년에는 공창(公娼)폐지를 풍자한 〈스트라이크 부시〉 등이 유행했다.

당시에는 거리에서 팔고 다니는 가사집이 엥카시(演歌師)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1902년에 엥카 장사단이 해체되고 소에다 아젬보오(添田唖蝉坊)가 두각을 나타내며

그의 〈랍파 부시(ラッパ節)〉가 러일전쟁 중에 대유행을 했다.

그 뒤로 직접적인 정부비판은 서서히 후퇴하고 서민의 생활애환을 다루게 되었는데

이 무렵 창가(唱歌)·기숙사 노래[료오카(寮歌), 주로 구제(旧制) 고등학교 기숙사 노래가 많았다]·

군가 등의 양악계통의 노래에 가사를 바꾼 노래가 등장했다.

1907년에는 무성영화의 반주에서 힌트를 얻은 바이올린이 도입되고 나서부터는

하이칼라 이미지가 강해지고 고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불러 생원노래[쇼세에

부시(書生節)]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가사도 반항적인 색채가 퇴색하고

비련 등의 감상적인 내용을 다루게 되어 급기야는 강경파에게서 비난이 쏟아졌다.

서커스의 취주악대인 진타가 자주 연주한 곡 〈천연의 미[텐넨노비(天然の美)]〉에

어떤 엽기적인 사건을 감상적인 가사로 노래한

〈야밤의 추억[요와노 츠이오쿠(夜半の追憶)]〉이 대표적인 곡이다.


 

한편 아젬보오 등은 여전히 거리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1911년대에 들어서는 노래의 주요한 미디어는 레코드로 옮아가고 있었다.

현재 엥카의 기원으로 되어 있는 것은 나카야마 심페에(中山晋平) 작곡·노구치 우죠오(野口雨情) 작사의

〈센도오고우타(船頭小唄)〉였는데 그 염세적인 내용이 대지진을 초래했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한순간을 풍미했다.

 

191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 스스로 만든 선율을 사용하는 엥카시도 등장했다.

아젬보오의 아들 사츠키와 손을 잡고 가두에서 노래부르던 톳토리 슝요오(鳥取春陽)는

자신의 노래 〈새장의 새[카고노도리(籠の鳥)]〉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되고 이것이 영화화된다.

그는 거리의 엥카와 레코드 엥카를 접목시키는 다리 역할을 한다.

또한 녹음기술 향상에 따른 관현악 연주의 유행가가 나타나고

1925년대의 레코드 가요의 기초가 된다. 1925년대에는 후쿠오카(福岡) 태생으로

주로 유년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코가 마사오(古賀政男)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는 당시 한국가요의 요소를 일본으로 가지고 갔으며

지금도 한국계 엥카가수가 많이 활동하는 것 외에 홍콩, 대만계의 가수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가요가 동아시아의 가요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그는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淚か溜息か)〉·〈그림자를 사모하여(影を慕いて)〉 등으로

한 시대를 리드해나간다. 당시 그의 노래는 엥카(艶歌)·코가(古賀)멜로디라고 불리었다.

   

그 뒤를 이어 작곡가로는 코세키 유우지(古関裕而)·만죠오 메타다시(万城目正), 작사가로는

나가타 미키히코(長田幹彦)·시마다 요시후미(島田芳文) 등이 대표적이었고

전후에는 엔도오 미노루(遠藤実)·요시다 타다시(吉田正)·후나무라 토오루(船村徹) 등이

대표적인 작곡가로 팝의 영향을 받은 엥카를 만들었다.

작사가로는 사에키 타카오(佐伯孝夫)·호시노 테츠로오(星野哲郞) 등이 많은 명작을 남겼다.

셈 마사오(千昌夫)의 〈별그림자의 왈츠(星影のワルツ)〉·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의 〈

사랑한 사람(好きになった人)〉·모리 싱이치(森進一)의 〈항구의 블루스(港町のブルース)〉·

코야나기 루미코(小柳ルミ子)의 〈세토오의 신부(瀨戶の花嫁)〉·이시카와(石川)

사유리의 〈츠가루해협 겨울풍경〉 등이 히트 반열에 올랐고

또한 무라타 히데오(村田英雄)·미나미 하루오(三波春夫)처럼 나니와부시계에서

진출한 가수도 있는가 하면 키타지마 사부로오(北島三郞)와 같이 민요를 살린

후시마와시를 특징으로 하는 가수도 50, 60년대에 등장했다.

최고의 국민가수로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를 들 수 있으며

그녀의 노래 〈흐르는 강물처럼/카와노 나가레노 요오니(川の流れのように)〉은

일본국민이 21세기에 남기고 싶은 최고의 노래로 꼽히기도 했다.

 

항구, 눈물, 비가 엥카의 3대 요소로 불릴 정도로 개인의 비련, 이별, 망향 등이 녹아 들어간

가사가 많으며 엥카라고는 해도 다양한 창법과 양식이 존재한다.

1980년대에는 젊은이들의 엥카 이탈현상이 두드러져 국민적인 가요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노래방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