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여성편력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은 조선, 아니 한민족 역사상
몇 손가락에 들 만한 정치력을 보여준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다만 그 아들인 세종대왕이 워낙에 무지막지한 업적을 남겨서 잘 언급이 안 될 뿐이지요.
태종의 업적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려드릴 시간이 있을 겁니다.
대신 오늘은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
태종의 여성편력에 대해서 짧게 알려드릴게요.
태종의 자녀는 총 29명입니다. 슬하에 세종을 포함 12남 17녀. 정말 많지요?
조선시대 왕들 중 자녀수 랭킹 1위입니다. 다산의 상징으로 봐도 될듯하네요.
문제는 이 자녀들 중 상당수가 후궁을 통해 낳은 자식이라는 점이지요.
영웅호색이라고 했던가요, 태종은 여자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신하가 한 기생을 두고 싸우는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이 둘을 벌줬는데,
그래놓고 그 기생은 자기가 데려갔다는 일화도 있지요.....;;
덕분에 즉위 초기, 본부인인 ‘원경왕후’ 민 씨와 피터지게 부부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젊은 궁녀들을 침소로 들였으니 별 수 있나요.
게다가 원경왕후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여성이었지요.
‘왕자의 난’ 때 태종의 말이 홀로 돌아오자 남편을 구하겠다며
창을 들고 달려나간 사람이 원경황후입니다. 태종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여러 도움을 주기도 했지요.
정말 불같은 성격의 여걸이었습니다.
부부가 하나같이 성격이 괄괄하니 궁궐은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원경왕후가 태종의 승은을 입은 여인을 벌했는데, 이에 대노한 태종이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 소속 궁녀와 내관들을 모조리 쫓아낸 일도 있었습니다.
왕비의 수족을 모조리 잘라낸 것이지요.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태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하들에게 후궁의 법제화를 논의케 하였습니다.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고사까지 들면서 9명의 후궁을 두었지요.
원경왕후로서는 미칠 노릇입니다. 기껏 남편을 왕으로 만들어놨더니 대접이 이 지경이라니요.
두 사람의 마찰은 계속됩니다.
결국 태종은 폐비까지 언급합니다. 지금 말로 하면 이혼이지요.
이에 보다 못한 태종의 형님, 조선의 2대 왕인 정종 이방과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태종을 만류합니다.
“나는 아들이 없어도 젊은 날의 정으로 삽니다.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 합니까?”
태종의 결정에 절대 간섭하지 않던 정종인만큼 당시 상황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결국 폐비는 없던 일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태종이 이후에 얌전히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원경왕후는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1420년 창경궁에서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지요.
원경왕후는 현재 서울시 서초구의 헌릉에 묻힙니다.
2년 뒤 남편인 태종도 승하해 같은 곳에 묻히지요. 살아서는 글자 그대로 애증의 부부관계였지만
죽어서는 함께 묻혔습니다.
원경왕후는 세종의 친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최고로 잘난 남편과
그보다 더 잘난 아들을 둔 원경왕후인만큼 진정한 내조의 여왕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여성의 인생이 슬픔으로 가득했다는 점이 참 얄궂네요.
-박문국의 5분 한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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