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인문학

6.그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_나혜석

sunking 2016. 12. 11. 11:12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나혜석

바로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학가, 정월 나혜석.

미술을 공부하시는 분이라면 한번쯤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성별을 떠나서 그의 작품은 후기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지요.

하지만 오늘은 그녀의 미술사적 업적 대신, 여성의 인권에 대해 최초로 논의한

그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 ‘나가정’은 용인의 군수를 역임했던 인물로,

어린 나혜석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천부적인 예술 자질도 타고났지요.

1913년에는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기도 했지요.

고등학교 졸업 후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17세에 동경 유학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첫사랑인 ‘최승구’를 만나지요. 최승구 역시 동경유학생 중 천재소리를 듣던 인물로

이후 나혜석의 삶에 정신적으로 여러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916년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했기에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지요.

동경에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나혜석은 귀국 후 함흥에서 미술교사로 일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후학 양성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과년한 여식을 결혼시키려는

아버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였죠.


그녀의 아버지 나가정은 수많은 첩을 거느렸었고 어릴 적부터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지켜본 나혜석은 어머니와 다른 인생을 살고자 했습니다. 

함흥에서 만난 남자가 외교관 ‘김우영’이었습니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살 연상으로 이미 한 번 결혼했다가 사별한 상태였죠.

김우영은 6년 동안이나 그녀에게 구혼하였습니다.

 또한 나혜석이 3.1운동 때 함흥의 여성들을 독려한 죄목으로 투옥되자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달려오기도 했지요.

나혜석은 몇 가지 조건을 내걸며 1920년에 김우영과 결혼합니다. 


                               나혜석과 김우영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김우영은 지금의 기준으로써도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이 조건들을 수용합니다.

그들의 파격적인 결혼은 구설수로 올랐지요. 특히 남성들이 거칠게 비난했습니다.

그림을 위해 집을 비우는 나혜석은 부인의 역할을 못하는 것으로,

그런 그녀를 감싸는 김우영은 남자답지 못한 졸장부라고 말이지요. 

 

부부는 1927년에 세계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녀는 세계를 돌아보며 새로운 영감을 받았고,

서구의 여성운동과 지위 등을 견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혜석이 불행해지는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파리에서 김우영의 친우이자 천도교 지도자이며,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인

‘최린’과의 만남 때문이지요. 나혜석은 3.1운동 때 투옥된 경험이 있고 취미가 다양하며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 최린에게 호감을 느꼈지요.  

남편 김우영은 법 공부를 위해 홀로 독일로 떠납니다.


                                           나헤석의 풍경 작품과 누드화


떠나면서 최린에게 나혜석을 부탁했지요. 남편이 떠난 뒤 나혜석과 최린은 연인관계로 발전합니다.

나혜석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이것은 나혜석의 불륜이었거든요.

심지어 그 대상이 남편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막장 스토리네요.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요. 부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김우영은 이혼을 청구합니다.

나혜석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댁 식구들도 이혼을 종용하지요.

결국 추후 2년간 서로 다른 이성을 만나지 않으면서

재결합 가능성을 모색해보자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합니다.

그러나 김우영은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성과 결혼합니다.

최린과의 관계 역시 끊어지지요. 귀국한 나혜석은 자식을 두고 쫓겨난 이혼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녀가 기댈 곳은 결국 예술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작품 활동은 이때를 기점으로 다시 정점에 달합니다.

그와 동시에 나혜석에 대한 반발도 최고점에 이른 때이지요.

그 이유는 그녀가 1934년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이혼 고백서>란 글 때문입니다.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 고백서>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이것을 나혜석이 자신의 외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글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이중성을 비난하는 글이라고 봐야하겠지요.


그 근거로 나혜석의 이혼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최린은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일파로 변절하고 ‘조선총독부’의 요직에 앉으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요.

나혜석의 잘못은 분명히 확인해야겠지만,

그 때문에 <이혼 고백서>의 내용까지 부정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말이었지요. 그녀의 여성해방론은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사회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습니다. 수백 년간 유지되어 왔던 전통적인 정조 관념을 깨부수고자 했지요.  

그러나 사회는 냉정했습니다. 그녀의 글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지요.

나혜석은 이후로도 비난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정해진 거처도 없이 길거리에서 홀로 죽어갔지요. 

 

사실 이번 포스팅에 대해서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나혜석의 외도행위와 관점은 지금으로써도 논란이 되기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이 글을 올리는 것은 그녀의 주장이 앞으로의 여성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유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박문국의 5분 한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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