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
조선에는 이름난 서예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종합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유명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세종의 형 양녕대군 또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유명세로만 따지자면 역시 조선 중기의 서예가인 한호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본명인 한호보다는 호를 붙인 한석봉으로 더 유명하지요.
그의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유년기에 어머니와 벌인 세기의 대결,
‘나는 떡을 썰터이니 너는 글씨를 써라’ 배틀이 있겠으나
사실 그 외에도 재밌는 야사가 여럿 남아있습니다.
한 번은 명나라에서 주지번이란 인물이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또한 당대의 이름난 예술가였는데 100자로 쓴 시를 턱 내놓고 다음날까지
이 시의 운에 맞게 답시를 써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간단한 일이 아닌 만큼 주지번은 조선인들을 골탕 먹이려고 이런 과제를 낸 것이겠지요.
이때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차천로가 나섭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답시를 쓰겠다고 호언장담하는데 몇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하나는 술 한 동이를 준비할 것, 그리고 본인의 시를 한석봉이 받아 적게 할 것이었지요.
그날 밤 차천로가 술을 마시면서 즉석에서 시를 읊고 한석봉이 단숨에 글을 적어 내려가니
그 광경이 대단했다고 전해집니다.
다음날 시를 전해 받은 주지번, 조선인들이 얼마나 재주를 부렸을까 비웃을 준비를 하며
시를 읽어내려 갑니다. 그는 소리 내어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과 필체가 대단하여
목소리가 대궐 밖까지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또 흥에 겨워 읽다가 손에 쥔 부채가 부러지는지도 몰랐다고 하지요.
훗날 주지번은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 “왕희지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는 평을 내렸습니다.
왕희지는 중국 역사상 글씨 잘 쓰는 걸로는 으뜸에 꼽혀 ‘서성(서예의 성인)’이라 평해지는 인물인 만큼
주지번의 놀라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한석봉과 차천로, 그리고 또 다른 명문장가인 최립을 묶어 송도삼절이라 불렀는데
한석봉과 차천로는 이후에도 자주 팀을 이뤄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명나라에 외교문서를 보낼 때 차천로가 내용을 짜고 한석봉이 받아 적는 식이지요.
덕분에 한석봉의 글씨는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얻으려고 난리였다고 하지요.
하여간 글씨는 기가 막히게 썼습니다.
그런데 한석봉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면도 있습니다.
바로 글씨만 잘 썼다는 것. 그러니까 글씨 쓰는 것 외에는 별 재능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진사시에 턱걸이로 합격한 인물로 원래 하급관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그를 진급시킨 건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죠. 그러니까 낙하산입니다.
선조 또한 당대에 명필로 유명했는데 글씨 잘 쓰는 한석봉을 아껴 이런 인사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당연히 왕한테 싫은 소리하는 대간들이 반발했지요.
“와서별제(瓦署別提) 한호는 용심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방과 같아, 의관을 갖춘 사람들이 그와 동급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시키소서.”
-<선조실록> 선조 16년(1583), 윤2월 1일 기사
요약하자면 이 용렬한 놈이랑은 일 같이 못해먹겠다는 것.
이날 이후에도 한석봉을 탄핵하라는 대간들의 요구는 끊이지가 않았지요.
그럼에도 선조는 한석봉을 아꼈고 잘라버리라는 대간들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사실 외교문서 이쁨직하게 쓰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한지라
그냥 글씨 쓰는 일 전담케 하는 수준이었으면 별 문제는 없었을 텐데...
진짜 문제는 그가 임진왜란 이후 가평군수에 임명된 다음입니다.
가평군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전쟁 중에도 상당히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습니다.
당연히 전후복구사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유능한 수령이 필요했지요.
그러나 한석봉이 군수로 부임한 가평군은... 쫄딱 망해버립니다. 거의 가평군이 해체되는 수준이었지요.
"군수 한호는 위인이 용렬하고 어두워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직무는 살피지 않고
간리(간사한 관리)의 말만을 들으므로, 모든 고을의 사무가 오로지 간리의 손에 맡겨져
차역이 균등하지 못하고 징렴이 번거롭고 가혹하여,
백성이 고통을 못 견디어 날로 점차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루라도 관직에 두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도록 명하시고
각별히 가려서 보내도록 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34년(1601), 4월 21일 기사
이때만큼은 선조도 더 이상 쉴드 치기가 불가능했는지 대간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파직시키지는 않고 통천 현감으로 좌천시키지요.
이때 한석봉은 제대로 삐져버렸는지 장기인 글씨도 개판으로 쓰고 일도 안하고
이러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완전히 파직당합니다. 그리고 1년 뒤에 노환으로 사망하지요.
가평군 일이야 안 그래도 몰락가도를 걷던 고을이었던 만큼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할 수 있겠으나
말년의 모습을 보면 딱히 인성이나 행정능력이 좋았다고 평하기에는 어려워 보입니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한석봉의 삶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네요.
-박문국의 5분 한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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