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중앙일보에서 연재하는
[7인의 작가전]에 연재된 최옥정 작가의 <매창>에 관한 글이다.
조선의 걸출한 여류시인으로 칭송된 기생 매창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라 블로그에 업로드 해둔다.
죽로산방에서 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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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 - 매창
벼락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헤어지다
유희경은 애초에 세웠던 계획을 잊었다. 매창이 있는 부안을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
돌아가 마주칠 한양의 어지러운 정세도 그를 이곳에 붙들어둔 이유 중 하나였다.
목숨을 버티고 사는 일 앞에서 갈수록 무력한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다만 변명일 뿐이다. 지금 그에게는 오직 매창밖에 없었다.
매창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매창의 손으로 세상을 만졌다. 매창이라는 여인에게 자신의 목이라도
매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도 유희경은 열음(悅音)과 함께 시를 토해냈다.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유희경 앞에 선 매창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철부지 여자의 모습이었다.
떼를 쓰기도 하고, 수줍게 심중의 말을 내놓았다가 금세 거둬들이고, 겁 없이 큰 용기를 내기도 했다.
단호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내소사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선 유희경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미친 것이 분명하다. 내가 나 같지가 않구나.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유희경은 ‘내가’로 시작하는 문장을 수시로 뱉어냈다.
새로이 드러난 자신의 진면목 앞에서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평생 예의와 법도에 몸을 바친 그였지만 매창 앞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매창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둘만의 세상에 머무는 것에 아무 불만도 없었다.
지금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은 여태껏 그들이 가졌던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귀하고도 중했다. 매창은 유희경 앞에서라면 화내고 투정부리는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철없음이 오히려 가난한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유희경이 부안에 머무는 동안 매창은 객점의 문을 닫았다. 나중에 감당할 일 같은 건 알 바 아니었다.
그와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지냈다. 그것만이 지금 그녀가 일심을 바칠 일이었다.
그를 위해 거문고를 켰고 술을 따랐고 노래를 불렀고 뒷마당을 거닐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시로 적었다.
마음이 다 하지 못한 말, 몸이 다 바치지 못한 연정은 시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렸다.
“제가 무척 따르는 언니가 하나 있는데 같이 만나러 가지 않을래요? 곰소 바닷가에서 염전을 하는데
혼자 고생이 많을 거예요. 가서 안부도 묻고, 당신 얼굴도 보여주고 싶어요.”
매창이가 말하는 언니는 애월이라는 선배 기생이다. 언니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많았다.
마흔이 넘었으니 엄마뻘이다. 매창은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밥을 얻어먹고 오곤 했다. 애월의 음식 솜씨는 근방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뛰어났다.
맛난 음식 만들어서 남 먹이는 게 낙이었다. 유희경은 매창과 가까이 지내는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들이도 하고 싶어서 그러마고 했다.
바깥세상은 봄날의 짙어가는 신록 냄새로 그득했다. 박달나무의 애기손톱 같은 이파리가
햇빛에 윤기를 내며 팔랑거렸다. 노간주나무의 바늘잎도 봄기운 앞에서는 날이 서지 않고 보들보들했다.
여리고 비릿한 냄새가 감각의 구멍을 크게 벌렸다.
나무도 꽃도 시냇물도 같은 박자로 매창과 더불어 숨을 쉬었다.
꽃이 봉오리를 벌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비가 날개를 퍼덕이는 기척을 알아차릴 만큼 오감이 활짝 열렸다.
그녀의 몸 깊은 곳이 꽃술처럼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아 있음을 내보이고 싶어 몸살을 했다.
매창은 유희경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꽉 잡고 깍지를 끼었다. 그녀는 청춘이었다.
육체의 요구가 극심한 스무 살.
애월의 집은 갈대로 지붕을 대충 엮은 초막집이었다. 염막은 저쪽이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꽤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바닷물을 퍼다가 끓여서 소금을 만든다고 했다.
집은 바닷가 언덕 밑에 있었고 주변에 방풍림으로 소나무를 많이 심어서
눈비를 막기에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애월은 마당에서 백합 조갯살과 해초를 다듬어 말리고 있었다.
매창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얼굴로 달려오다가 유희경을 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애월 언니, 보고 싶었어요.”
매창이 먼저 달려가 안겼다. 마음이 복받치는지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몸을 돌리더니 유희경을 가리켰다.
“언니! 인사해요. 매창이가 오늘은 서방님과 함께 왔답니다.”
애월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유희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계나 불신이라기보다는 피붙이끼리 서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에 가까웠다.
가족이 없는 매창에게는 이런 사람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도 남았다.
애월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문지르더니 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냥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왔다고 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잠깐 그냥 들렀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침 먹고 출발해서 점심때가 다 되어 도착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술이라도 받아놓을 것을 먹을 게 하나도 없을 때 찾아오면
사람이 면구스러워 어쩌라는 말이냐고 애월은 죽는소리를 했다. 마흔두 살이라고 했지만
얼굴이 주름으로 뒤덮여 쉰 살도 더 돼 보였다. 염전일이 힘든 모양이었다.
“신역이 고된가 보네. 언니 얼굴이 좀 빠진 것 같아요.”
“낙이 없어서 그런지 해가 바뀌는 대로 금방금방 늙는다. 어디 정붙일 데가 없으니
늙어서 빨리 저세상으로 가고 싶은가 보다. 자식이라도 있으면 애 키우는 고생이라도 낙으로 생각할 텐데…….”
그거였다. 애월에게 없는 것. 좋든 나쁘든 인생에 고갱이가 없었다. 자기를 삶에 비끌어맬 명분이 없었다.
누릴 부귀영화도, 돌볼 자식도, 정 줄 남자도 없이 혼자 늙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남은 생을 줄여가고 있었다. 그런 사람치고는 강단이 있어 보였다.
“언니는 요새 뭘 해서 먹고살아요?”
“고깃배 들어올 때 가끔 일손이 딸리면 동네 사람들이 부르러 오거든. 물고기라도 한 줌 얻어오면
그걸로 마른반찬을 만들 수 있으니 짜디짠 살림에 보탬이 되더라.”
애월이 부지런히 준비해온 바지락죽으로 점심을 먹었다. 유희경은 내내 말이 없었다.
까닭 없이 가슴이 무엇으로 틀어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애월은 또 놀러 오라면서 말린 생선이랑 미역을 싸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유희경은 바지락죽이 얹혔다며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손끝을 주무르고 수선을 피웠다.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가 없는 매창의 삶이 저러할 것임을 미리 본 것이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매창의, 자신의 운명임을 또한 보았다. 숨이 막혔다.
매창은 그와 나들이하는 것만 즐거운지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옛날에 애월과 같이 관기 노릇 할 때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모처럼 수다스러운 그녀를 보는 게 좋으면서도 맞장구를 쳐주지는 못했다.
그날 밤 유희경은 밤새도록 앓았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었다.
낮의 일은 밤의 꿈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났다. 옆에 누워 있던 매창을 안으려고 끌어당기는데
애월의 뻣뻣한 몸이었다. 소금밭에서 가래로 소금을 밀고 있는 여인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데 얼굴이 매창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진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깼다.
악몽을 꾸었냐고 묻는 매창에게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매창은 키가 더 크려고 그런 꿈을 꾼 거라며 좀 더 자라고 등을 다독거렸다.
고통을 매창과 나눌 수 없고, 매창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지난밤은 평생 잊지 못할 격정의 밤을 보냈다. 그전과는 사뭇 다른 교합이었다.
쾌락과 욕망의 몸짓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태워 없애려는 몸부림 같았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손짓, 몸짓, 소리 하나하나가 필사적이었다.
그 뜨거움 때문에 잊지 못할 것이고, 쥘 수 없는 것을 쥐려 하는 애달픔 때문에 잊지 못할 것이다.
몸이 깊은 곳에 가닿을수록 마음은 두려움에 떨었다.
별리. 부재. 결락,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견딜 수 없어서 그녀는 부엌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했다.
유희경은 아침밥을 먹자마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얼마 후 유희경은 편지를 써서 통인에게 들려 보냈다.
매창아 보아라.
때 이른 찬바람에 창밖의 매화가지 건듯건듯 흔들린다.
꽃이 다 지고 이파리가 초록빛을 띠기 시작한 지가 어제만 같은데
어느새 검질긴 줄기에서 나온 나뭇잎의 녹색이 성성하구나.
오늘따라 매화나무가 바람에도 비에도 몸을 뒤챈다.
그리하여도 막을 길 없는 것이 비의 길이요, 바람의 방문이요, 차고 뜨거운 날씨의 변화임에랴.
이 세상의 흔들리는 것들, 약한 것들, 헤매는 것들이 이리 사무칠 줄 예전엔 알지 못했다.
나만이 세상에 우뚝 선 존재였고 나만이 대단하여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저 세상의 더러움이었고 사나움이었고 어리석음뿐이었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
먼 곳에서, 아니 멀지 않은 곳에서, 아스라이 앉아 있는 너를 위해
고작 이 말밖에 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다오. 힘없이 너를 부르듯 부끄러운 마음으로 네게 당부한다.
잠시 슬퍼하되 비탄에 빠져 너를 상하게 하지는 말기 바란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보다 더 두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내가 다시 찾을 그 날까지 너를 따사로이 보살펴야 하느니라. 나무가 듣든,
바람이 듣든, 그냥 허공에 흩어져버리든 나는 자꾸 무슨 말인가를 해서
마음이 단단히 뭉치는 걸 피해 보려고 애쓴다. 돌멩이처럼 가슴 한구석에 맺힌 너를 향한
이 갈망이 원망의 칼이 되어 나를 찌르고, 세상을 찌르고, 급기야는 너를 찌르게 되니 말이다.
매창은 더 읽지 못하고 편지를 두 손으로 붙잡고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의 깊은 마음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유희경에 대한 감사와 연민의 눈물이었다.
왜 이 사람을 이렇게밖에 만날 수 없는가 하는 한탄이었다. 그의 말대로 ‘애이불비’였다.
서러움도 그녀의 사랑만큼이나 진했다. 마음의 안과 밖이 모두 슬픔 하나로 뭉친 순결한 슬픔이었다.
가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편지를 다시 펼쳐서 읽어 내려갔다.
너에게 갈 것이다. 네게로 가고 있다. 너는 거기 있느냐?
이런 말들을 수없이 홀로 되뇌며 나는 여기 서안 앞에 앉아 책을 읽지도 시를 짓지도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만 내다보고 있다. 회화나무에서 진초록 이파리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저 잎들도 곧 땅에 떨어져 이내 썩을 것이다.
흙과 바람과 비가 합심해서 나뭇잎을 썩히고 그 거름으로 내년에 다시 잎을 피워 올리겠지.
내 너를 위해, 너의 꽃피울 젊음을 위해 흙이 되고 비가 되고 바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나는 잠시 네 위에 내려앉았다 호르르 날아가 버릴 노고지리가 아닌가 싶다.
나는 내가 부끄럽다. 더 젊고 싶고 더 강하고 싶고 더 잘난 남자이고 싶다.
지금 나는 힘없이 늙어가고 있는 초라한 가난뱅이일 뿐이다.
나의 침침한 눈과 흰 머리카락을 놀리는 너의 말이 내겐 심장을 겨누는 비수와 같았다.
무심결에 한 말인 줄 안다. 어린 너는 그 말이 내 나이의 사람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돌아서 나왔다.
나 때문에 너무 마음 태우지 말아라.
노고지리가 제아무리 고운 노래로 네 곁에 즐거이 머문다 해도 한 식경도 채우지 못할 객일 뿐이다.
새는 자기가 한때 앉아서 노래 불렀던 나무가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계절이 네게 푸른 잎을 피웠듯이 노고지리를 불러들였고, 새는 떠나고 너는 잎을 떨어뜨릴 것이다.
이 어리석은 말들, 이 부질없는 넋두리 앞에서 나는 애가 끊어지는 것만 같구나.
지금 이 순간 새처럼 네게로 날아가 한낮 햇볕처럼 바람처럼 너를 만지지도 않고
안지도 않고 그저 네 거문고 소리나 듣다 돌아오고 싶다.
유희경의 편지를 두 손에 쥐고 매창은 눈물을 흘린다.
그의 심장이 흘린 피가 그녀의 앞섶을 적시고 발바닥 밑에 고이는 것만 같았다.
그의 환부를 만져주고 잘 싸매주고 싶었다. 후원의 앵두나무 아래에서 이미 읽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지난밤 내린 봄비로 앵두나무 꽃이 마당에 수북이 떨어졌다.
나무 밑에 떨어진 붉은 꽃송이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와 답장을 쓴다.
그녀의 심장에 농익은 앵두 빛깔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순간을 잠깐도 견딜 수 없었고 잠시도 기다릴 수 없었다.
상황이 자신에게서 어긋날 때 그녀는 더욱 강해졌다.
삶을 버텨주는 힘은 부정적인 기운에서 나올 때 더 끈질기다.
질투와 소유욕과 원망으로 버틸 때 삶은 더 강고하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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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옥정은 1964년 전북 익산 출생으로 건국대 영문과와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했다.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하였으며 허균문학상과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하였고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을 수혜받았다. 저서로는 소설집 『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 『On the road』,
에세이집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 『소설수업』, 번역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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