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모 대학 입학50주년을 자축하는 행사를 글쓴이가 기획하고 연출을 맡은 바가 있다.
이 행사에서 졸업 후 처음 나왔다고 하는 대학교수 한분이 계셨다.
자상하고 기품이 깃든 모습에서 세상을 부드럽게 살아온 분이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분이 여러 친구들에게 그 동안의 미안함을 죄스럽게 생각한다며
적지않은 행사기금을 찬조하고 그동안 살아왔던 일상의 얘기가 담긴 산문집을 친구들에게 한권씩 선물했다.
나는 동기생은 아니지만 연출자로 대우받아 한권을 받았다.
글 내용도 담백하지만 우선은 읽기에 부담이 없어 단숨에 읽을 수가 있었다.
나도 글을 쓰면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오래 전에 발간된 책이지만 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이나 詩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계신 분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될 것 같아 포스팅 해둔다.
죽로산방에서 서pd
벤치가 외롭다.
말은 크게 두 가지 쓰임새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동을 드러내는 것인데
앞의 것을 말의 사전적 의미라 하고 뒤의 것을 시적 의미라고 한다.
예컨대 “태양은 은하계의 변방에 있는 하나의 별이다.”라고 했을 때
이 말은 태양에 대한 사실을 나타낸 객관적인 전술이지만,
“그대는 나의 태양이다.”라고 했을 때 태양은 비유적이고 주관적인 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R.웰렉은 이러한 쓰임에 따라서
과학언어와 문학언어로 나누어 전자를 외연적 쓰임, 후자를 내포적 쓰임이라고 했고,
I.A 리처즈도 언어를 비정서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으로 구별하여 과학과 시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은 일상의 대인관계나 언어생활에서 종종 오해를 하거나 엇갈림으로 불편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나 엇갈림도 자세히 따지고 곰곰이 반성해 보면
말의 쓰임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장.콕토가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교향악을 그리워한다.” 라고 했을 때
만일 우리가 장.콕토의 귀가 기형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막힌 넌센스일 것임이 틀림없다.
즉 장.콕토의 시적 표현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터무니없는 해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귀는 소라껍질”이란 말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들에게 어떤 감동을 준다는 점이다.
왜 그것이 감동을 주는 것일까? 그 대답은 짧고 분명하다.
즉 그것은 객관적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실’과 ‘진실’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한마디로 ‘사실’을 추구하는 것은 과학이고
‘진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다.
이러한 건조하고 딱딱한 얘기를 대신해서 문학적 언어에 대한 나의 생생한 경험을
한 토막 소개하는 것으로써 ‘사실’과 ‘진실’ 혹은 언어의 두 가지 쓰임에 대한 설명에 대신하겠다.
지금부터 십여 년 전 늦은 가을의 일로 기억된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달성공원엘 갔다.
나의 옆에는 머리가 길고 눈빛이 서늘한, 그래서 언제나 내 가슴을 떨리게 한
S가 있었고 나는 두 장의 입장권을 샀다.
사방은 어둑어둑해서 수은등이 차츰 빛을 발하는 아주 낭만적인 시간이었고,
포도 위에는 몇 개 낙엽도 구르고 있었다.
사슴 우리를 지나고 어둠에 잦아드는 관풍루 앞으로 내려왔다가
우리들은 그 앞의 돌계단에서 ‘가위 바위 보’로 계단 먼저 내려가기 게임을 했다.
오리와 새들이 잠들기 시작하는 연못가를 거닐 때 S는
철책을 팅, 팅, 팅, 손으로 가볍게 퉁기면서 사뭇 즐거워했다.
물개와 불곰 우리 사이의 계단에서 우리들은 다시 ‘가위 바위 보’게임을 했고,
아주 작고 하잘 것 없는 것을 놓고 고집도 부리며 토론도 했으며
많이 웃었고 그녀는 깡총걸음을 자주 걸었다.
우리는 상화시비(尙火時碑) 앞에 나란히 섰다.
달이 휘영청 밝았지만 늦가을의 싸늘함 탓인지 사람들은 별로 다니지 않아서 주위는 고요했다.
우리는 이상화 시인과 그 일부가 새겨져 있는 [나의 침실로]라는 작품과,
특히 그 ‘마돈나’라는 여자 이름에 대해서 제멋대로 얘기했다.
내가 뭐라고 말했을 때였는데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젖히고 웃었다.
그때 그녀의 희게 드러난 치아에 달빛이 부딪쳐 반짝이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또한 머리를 뒤로 젖혔기 때문에 연하게 그늘지던 목 부분의
신비스러운 윤곽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녀가 한쪽 손으로 머리를 잡았을 때 그녀의 바바리코트 소매 끝에 희게 나와서 나풀거렸던
흰 블라우스의 빛깔 또한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고,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도 역시 내 귓가에 아직껏 묻어 있는 듯하다.
그 날 저녁 달성공원에서 그녀는 요컨대 나에게 한 마리 나비였고 예쁜 부리를 갖고 있는 새새끼였고
날개옷을 입고 있는 안타까운 선녀였으며 기쁨의 이슬이었고 동시에 아픔의 가시이기도 했다.
그녀의 작은 숨결 하나도 어둠을 흔드는 바람이 될 수 있었고,
그녀의 짧은 눈빛 하나도 우주를 출렁이게 하는 힘이었으며
그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내게는 어떤 절대적인 비의(秘儀)로 비쳐졌다.
다리도 쉴 겸 우리들은 현재 어린이헌장비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간혹 낙엽이 포도 위를 굴러갔고 산보객들이 지나가면서 우리들을 힐끔힐끔 돌아다 보기도 했다.
그 날 나는 행복했다. 우리는 수수께끼, 어릴 적 이야기, 영화 이야기, 소설책, 군대 이야기 등
닥치는 대로 화제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재미있게 요리했다.
달빛은 깨끗했고 우리가 앉아 있던 낡은 벤치는 한없이 정답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1년인가 2년 후 늦은 가을 어느 날이었다.
하숙집에서 저녁상을 물리고 났을 때 나는 불현 듯 S생각이 났고,
그러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억제할 수없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달성공원엘 갔다. 그 날 나는 입장권을 한 장 밖에 살 필요가 없음을 슬퍼했다.
사슴 우리를 지나고 관풍루 아래 돌계단에서 나는 그녀와 가위 바위 보를 했던 일을 회상했다.
연못가의 철책을 나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으로 팅, 팅, 팅, 쳐보았지만
그 소리는 차갑고 쓸쓸하게 끊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상화시비 앞에 혼자 기대어 서서 그녀가 머리를 젖히고 웃던 모습을 상기해 냈다.
그리고 그녀의 희게 드러난 치아에 달빛이 부딪쳐 반짝이던 순간과,
목 부분의 신비스러운 그늘과 바바리코트 소매 끝에 나와서 나풀거렸던
흰 블라우스 자락을 기억해 냈으며 그때까지 귓가에 남아 있던 그녀의 맑은 웃음조각을 생각했다.
나는 다시 현재 어린이 헌장비가 있는 시계탑 아래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거기에는 벤치가, 지난해엔가 그녀와 나란히 앉았던 그 벤치가 그대로 거기 놓여 있었는데...
아 그 벤치가 한없이 외롭게 보였다. 그때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벤치가 외롭구나!’
사실 그랬다. 벤치가 외로웠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정확히 표현한다면, 절대로 벤치가 외로울 리는 없다.
벤치는 감정이 없는 한낱 물건에 불과하므로,
나는 그 말을 ‘아아, 벤치를 바라보는 내가 외롭구나!’라고 표현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래야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사실에 맞는 표현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단언하건대
당시 내가 벤치 앞에 섰던 그때는 분명히 ‘벤치가 외로웠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벤치가 외롭다는 말은 참으로 진실한 표현이다.
정지용은 [유리창]이란 시에서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라고 쓰고 있다.
사실은 유리를 바라보는 시인 자신의 마음이 슬픈 것이지만
그 순간에는 오히려 유리에게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고 함이 더 진실한 표현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S와 이별한 후 그녀와의 추억을 안타깝게 하나씩 불러일으키면서 걷고 있던 나에게
그 벤치의 정직한 존재방식은 내 외로움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벤치가 외롭다’고 본 것이다.
‘벤치가 외롭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말의 두 가지 쓰임 중에
정서적, 시적 의미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하나의 좋은 보기이다.
과학의 발달을 위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말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말의 정서적 울림을 우리는 소중하게 받아 드려야 한다.
전자가 삶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과 진실이라는 두 개의 차원을 늘 서로 잘 융화시켜야 할 것이다.
‘벤치가 놓여 있다.’는 ‘사실’에 못지않게 ‘벤치가 외롭다.’는 ‘진실’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0 0 교수 산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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