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독자의 글에서 발췌
관계
모임엘 갔다가 나간 길에 다른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오니 컴컴한 저녁때다.
테이블 위 누군가 보낸 소포가 뜯겨져 있다.
짝이 먼저 뜯어보고 외출한 흔적이다.
며느리가 보낸 소포다.
XX-CHEK이라 씌어 진 혈당측정기였다.
'이런 생각을 어찌했을까, 얘가...' 신통하고 고맙다.
지난 3월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을 때 집으로 부쳐온 결과 책자에 재검 용지가 끼워져 왔었다.
검진결과지를 집에서 가까운 병원 우리 담당의 신 선생님께 가져가면 다시 채혈을 하고 후속조치를 해 준다.
채혈해 잰 당 수치가 127. 여태까지 당 수치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좀 당황스럽다.
의사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당 수치가 올라 가기도 하고 이 숫자를 한 번 보고는 당뇨라고 하기는 무리라며
이 정도는 운동으로 얼마든지 낮출 수 있으니 꾸준히 운동하기를 권했다.
그때가 5개월 전쯤이었다.
걷기운동을 숙제로 내주면서 석 달 후에도 수치에 변화가 없거나 올라가면 안 된다며 꼭 걷기운동을 당부했었다.
이틀에 한 번 집 근처 공원까지 걷기를 석 달 하고도 두 달.
3개월 후인 2개월 전 가서 재니 123으로 눈꼽만치 낮아졌다.
그걸 보고 신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격려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낮아졌다는 자체가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신 선생은 환자의 기분 좋게 해 주고 친절하기는 대한민국에서 일등이다.
혈당측정기를 하나 사야겠다고 했더니 신선생님은 가정에서도 있으면 편리하다며 xx제품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추천을 해주었다.
곧 사야지하면서도 두어 달을 밍기적거렸다.
며칠 전 이사한 아들집을 다녀왔었다. 아들이 어제도 운동을 했는가 물으면서 혈당측정기를 샀는지 궁금해 했다.
그게 자꾸 미루어진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사 보낸 것이다.
아들은 늘 바쁘고 아마 어미가 인터넷에 검색을 해 사서 보낸 것 같다.
난 인터넷으로 살 생각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하고 늘 의료기기 샵을 생각했었다.
어제 모임은 아들 고2 때 친구들 엄마 모임이었다.
그 중 한 엄마가 나와 함께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의 가슴앓이 한 푸념을 투덜거린다.
그의 맏아들 얘기였다.
대학교수인 아들이 학교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아 미국을 가게 되었는데 아들은 두 달 후에 떠나게 되었고,
영어 때문에 손자와 먼저 미국에 가 있는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와 돌려가며 식구 수대로
전화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손자와 할머니가 통화를 하고 그 다음 엄마와 통화를 하라며 좀 떨어진 부엌에 있었는지
그의 엄마에게 손자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 며느리는 '왜 바쁜 엄마를 부르느냐'며 소릴 지르더라는 것이다.
친정 어미면 그러겠냐며 펄펄 뛴다.
'아~철이 없는 거... 썩 내키지 않더라도 조금만 참고 바로 받지 않고는...'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도 새해도 전화 한 번 안 하고는 미운 시어머니와는 통화도 하기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냐며 그 손자가 무얼 보고 배울지 한심하다고 한탄을 하였다.
아들은 자기 집은 세를 놓고 두 달 후에 미국엘 가는데 우선 그간 이 부모님 집에 두 달을 함께 있는 중이라 하였다.
이런 걸 아들에게 얘길 하면 아들은 며느리 얘기만 하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 아들은 우리 아들 친구의 바로 위 형이다. 그는 S대학에서도 4년간 학점을 잘 받아 스탠포드 유학을 다녀와
서울의 유수한 명문대학의 교수다.
키도 훤칠하고 인물이 좋으며 성격도 좋은 그녀의 장남이다.
신언서판이 껀충하다. 아들 친구인 차남 역시 형과 같은 학력에 명문대학의 화학과 교수다.
장남은 성격 좋던 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주 딴사람이 돼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였다.
그 엄마는 날이 갈수록 며느리가 점점 더 용렬해진다며 걱정을 하면서 착한 아들이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순전히 며느리 탓이라며 푸념을 하였다.
아들이 장가를 가면 정나미 떨어지거나 실망을 하는 일이 크든 작든 그 집 뿐일까, 말을 안 할 뿐이지.
그런데 그 며느리는 너무 원색적(?)이란 생각이 든다.
동병상련 같은 걸 공감하면서도 이건 며느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며느리 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며느리 아들 시어머니 관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각 집안이 조금씩 다르게 부닥치는 문제일 뿐이다.
부쳐온 혈당측정기에 입이 헤~ 벌어진 것도 알고보면 거기서 거기다.
본질적으로 인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는 같다는 뜻이다.
객체들끼리의 조합이 시작하면서 발원한 관계...
어느 집이나 첨부터 이 관계형성이 익숙할 순 없다.
다만 조금의 백지 한 장 표현의 차이일 뿐. 쪼끔 더 달리 부드럽게 포장을 할 뿐이다.
포장의 색깔은 다양하다. 인내, 교양, 가정교육 내지 견문 등으로...
며칠 전 혼자 하룻밤 아들이 집에 왔을 때,
그간 아들에게 못마땅하거나 서운했던 걸 모처럼 많은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그게 그건지 모르겠지만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에게 두세 번 서운한 것이 있었다.
"고런 것들이 서운하셨구만요. 오마니. 앞으로는 그런 일을 특히 조심하겠십니다, 오마니..."
아들이 은근슬쩍 눙친다. 아주 고단수다.
어쩌겠는가, 아들이니...스르르 그냥 또 넘어가야지...
그래도 고마운 사실은 어제 그 엄마의 푸념을 들어서일까?
집으로 혈당측정기를 구입해 보내온 며느리가 유달리 고마운 생각이 든다.
박사과정을 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이런 가족관계 형성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효자 효부를 부모가 만든다고 하는 것은 이런 바른 관계 형성을 조절하며 자식들에게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3주 전, 당 수치 내리는데 좋다며 뽕잎차로 꼭 끓여 드시라며 몇 주 전엔 마른 뽕잎을 비닐봉다리에 꼭 싸서
며느리가 건네주었다.
'핫! 요게 요런 걸 어디서 배웠을까?' 놀랍고 고맙다.
부모는 자식에게 온 몸을 헌신하고 홉으로 받아도 감격을 한다. 젊었을 때는 그걸 모른다.
어느 중년부인의 글 _조선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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