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카나다에서 온 친구의 이야기 2

sunking 2013. 12. 20. 12:56

카나다에서 온 친구 심현섭의 이야기

 

아들을 효자로 만든 어머니

어둑어둑 어둠이 짙어가는 저녁나절에 수원으로 오랜 친구 현배를 만나러 갔다.

그 옛날 홍콩 공항에서 삐삐를 차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우유곡절 파란 만장, 무슨 말로도 그가 살아온 세월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젊어서는 보컬 그룹에서 키타를 쳤고, 자신이 가진 재능에 짓눌려서 홍콩으로 갔고,

다음에는 일본으로 가서 대학원을 나왔다.

그 동안 그의 생계를 이어준 것이 나이트 클럽에서의 키타였다.

광동어에 익숙하고 일본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했다.

아이디어가 넘치니 가만히 있질 못하고 사람들이 꼬여들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아슬아슬하게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 다녔다.

삐끗하는 날이면 감옥행이 될 수 있는 거대한(?) 사업을 벌렸다.

 

100억, 200억이 입 언저리에서 굴러다녔다.

‘일만 잘되면 너한테도 몇 억 줄게’하면서 내게도 호언을 일삼았다.

손바닥 위에다 황소를 올려놓고 있는 힘을 다해서 후하고 불어보던 시절이다.

 

이런 친구가 가정을 제대로 돌볼 일이 없고,

젊어서 홀로 된 어머니가 8군에서 오랜 동안 일하며 뒷바라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음에 빠졌다던 마누라는 아들 하나를 낳고 슬그머니 집을 나가 할머니가 손주를 키웠다.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한다던 친구는 어느 날,

곱상한 중국처녀를 데리고 들어와 수원에서 살림을 차리고 딸 하나를 낳았다.

아내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쳤고 생애 처음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간다고 여겨졌다.

행복한 날은 오래 가지 못하고 아내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온갖 항암제 치료를 하고도 결국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불행은 짝을 이룬다던가!

작년 이맘때 열여덟 어린 나이에 딸아이마저 자살로 생을 마쳤다.

아파트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는 데 친구가 뜸금 없이 오른 쪽 잔디 위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야!”

 

“아니 바로 여기라니 뭐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친구가 허탈하게 말했다.

 

“그 아이가 떨어진 자리라고.” 머리끝이 쭈뼛하게 솟는 기분이다.

 

엄마도 없는 아이를 잘 좀 살펴주지 그랬어.”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자상하게 대해주었지. 살고 죽는 게 다 팔자고 운명이더라고.”

 

아파트 문간 사랑방에 연로한 할머니가 침대에 홀로 앉아 계시다가 일어나 나오신다.

94세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알다 뿐인가. 날 정말 금방 죽을 늙은이로 취급하시네.”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아내가 준비해준 신사임당 두 장이 들어있는 흰 봉투를 손에 쥐어 들였다.

 

제 집사람 심부름인데요,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시면 가끔 몇 번 사 드시라고 했습니다.”

 

아유 너무 과분하네. 현배가 워낙 잘 해주니까 아무 불편이 없어요. 용돈도 넉넉히 주고,

동네에 소문이 날 만큼 효자가 되었어.”

 

그게 다 어머니가 장수하시기 때문에 얻은 복입니다. 젊은 시절 동서남북으로 떠돌 때 어머니께서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이제 철이 들어 어머니께 제대로 효도 한 번 하려고 해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없으시면 모두 허사가 아니겠습니까. 어머니가 오래 사셔서 현배를 효자로 만드신 거라고요.”

 

그런가. 나 이젠 조금 있다가 죽어도 별 원이 없네. 아들 하나, 손주 하나가 모두 효자가 되어

잘 살고 있으니 뭘 또 원하겠나!”

 

손주 하나는 결혼해서 대기업에 들어가 북경에서 근무하고 있고

아들만큼 할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극진하다고 한다.

 

46평짜리 큰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하얗게 쉰 머리를 염색도 않고

노숙하고 원숙한 모습으로 그는 늙어가고 있었다.

 

홍탁을 안주로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막걸리 잔을 기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