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글쓴이가 대학에서 문화교양학을 study하면서 동서양 문화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여러 도서를 비교 검토하면서 동서양간의 문화에 대한 차이와 통합에 대해 Report한 글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일천하여
서강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선배에게 자문을 구해 정리해 둔 글임을 밝혀둡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지만 추후 작성을 위해 업로드 해둡니다.
죽로산방에서 서pd
동서양 문화의 정체. 차이 통합에 대하여...
1. 서양문명의 발원지
우선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근동과 중동은 경계가 애매하므로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근동 또는 중동은, 그러나,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유럽에서 가까우니 ‘근동’이고 유럽과 ‘극동’의 사이에 있으니 ‘중동’이다.
지금은 뒤늦게나마 다행하게도 ‘서아시아’ 또는 ‘서남아시아’로 고쳐 부른다.
서아시아와 동북 아프리카를 아우른 지역인 오리엔트도 로마에서 보아 ‘해가 뜨는 곳’이므로
역시 ‘동방’이라는 뜻이다.
동양철학을 영어로 'Oriental Philosophy'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큰 잘못이다.
‘서아시아’의 철학, 말하자면, ‘이슬람 철학’이란 뜻이 되므로. 'East Asian Philosophy'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오리엔트, 더 정확하게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발아했다.
‘비옥한 초승달’은 나일강 유역에서 시리아 사막의 북쪽을 돌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까지 아우르니
마치 초승달처럼 휘어져 보인다.
기원전 3,4천년에 이집트 사람들은 낭성의 공전 주기인 1458년 만에 365일에서 약간씩 남는 여분의 시간이
해소되어 원래의 연초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성좌의 이름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명명한 것 그대로이다.
문명의 기초 중의 기초인 역법은 그들이 발명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갖지 못해 문명의 발전을 거의 이룰 수 없었던 ‘바퀴달린 수레’와 글자는
이미 그들의 일상 도구였다. 수학은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푸는 수준이었다.
피라미드의 이집트인들과 바벨탑의 바빌로니아인들 또는 이라크인들이 바로 인류를 문명의 빛으로 인도한
선구자들이었다. ‘못 산다’고 오늘날 비웃음을 받는 그들이 말이다.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문명’, 더 정확하게는 ‘서구(라파) 문명’ 또는 ‘서 유럽 문명’의 발원지는
서양 또는 서유럽이 아니고 바로 이 ‘비옥한 초승달’이었다.
그들은 아직 미개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 서양문명의 형성과정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오리엔트는
페르시아 지배하의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된다.
문명의 강은, 그러나, 아직 오리엔트에서 맴돌 뿐 미개한 서유럽의 땅으로는 흘러들지 않았다.
역사의 연출가는 기원전 4세기에 유럽으로 비로소 시선을 돌렸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2년 페르시아를 치고 그리스와 오리엔트를 통합함으로써 마침내
서유럽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두 문명을 절충한 ‘헬레니즘’이야말로 서구 문명의 ‘영혼’이며 ‘정체’ (正體, identity)이다.
그리스어는 지금의 영어처럼 당시 세계의 공통어로 사용되었으며 신약성서의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이어서 세계의 패권은 로마로 넘어간다.
로마는 명실공히 세계국가를 건설하고 세계사상 유례없이 20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세계 평화가 유지된다.
--Pax Romana. 로마 제국은,
그러나, 당시의 원시적인 하부구조로는 원활하게 통치할 수 없을 만큼 방대했다.
395년에 동서 로마로 나뉘고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지만, ‘헬레니즘’ 또는
‘그레코로만 (Greco-Roman) 문명’이라고 불리우는 서유럽의 문명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일단 막이 내려진 것이다.
이후 서유럽은 6세기에서 9세기까지 프랑크 왕국이 지배하에 들어간다.
이 왕국의 가장 위대한 임금 샤를마뉴 대제 (불어: Charlemagne, 라틴어: Carolus Magnus, 영어: Charles the Great)는 정복 전쟁을 통하여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거의 다 회복하여
‘그레코로만 (Greco-Roman)’을 정치적 문화적으로 계승하여 서유럽 문명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참으로 웃기게도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에는 ‘카롤링거 왕조’라는 정체불명의 요상한 용어가 널리 쓰이는데 불어를 살려 ‘샤를마뉴 왕조’ 또는 라틴어를 살려 ‘카롤루스 왕조’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아마 왜정시대에 쓰이던 Carolus의 왜 발음이 ‘마르고 닳도록’ 남아있는 모양!)
샤를마뉴 대제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이태리로 쪼개져 현재와 같은 유럽 지도가 그려진 것이다.
현재는 미국, 직전에는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다 보니 서구 문명의 주체는 영국인들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상의 역사 고리에서 봤듯이, 그러나, 서유럽 문명의 적통은,
그리스-로마-프랑크를 이어 받은 불란서, 독일, 그리고 이태리인 것이다.
영국은, 문명사적으로는 주변국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세계어로서 최강의 위세를 떨치는 영어 덕택에
서유럽 문명의 적자인양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어떤가? 문화적으로는 주변국 중의 주변국에 불과하다.
유사이래로 ‘잘 먹고 잘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내세울 만한 문명적 전통도 별로 없다.
다만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한 덕택에 행세하고 있을 뿐이다.
넓게는 인류 문명, 좁게는 서구문명의 모체였던 오리엔트 문명은 ‘헬레니즘’, ‘그레코로만 (Greco-Roman)’ 또는
‘서구 문명’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일단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622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면서 서구의 기독교 문명권에서 이탈하여 이슬람이라는
독자적인 문명권으로 부활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을 아우르는 ‘동 아시아’와 대칭적 의미로서의 서양은 이로써 서유럽의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라는 두 문명권으로 분할된 것이다.
그러면 서유럽의 정체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헬레니즘’은 어떤 것이며 세계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
먼저 서구 문명의 대칭인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별하고 다음 다음 편에서쯤 ‘헬레니즘’의 속살을 들여다 보기로 하자.
3. 중국문화
서양과 대칭되는 개념으로서의 동양은 문명사적으로 한국,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하는 소위 ‘극동’ 지역을 가리킨다. ‘극동’은, 그러나, 근동 또는 중동처럼 유럽 중심적 사고 방식의 소산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가장 먼 동쪽’인 것이다.
근동 또는 중동을 서아시아 또는 서남아시아라고 고쳐 부르듯이 극동은 ‘동아시아’라고 해야 지리적으로 정확하고 유럽이 문명세계의 중심이라는 그릇된 통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미 보았듯이 서구문명은 오리엔트와 그리스의 두 원천이 합류하여 ‘헬레니즘’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호수를 이룬 다음 불란서, 독일, 이태리, 영국, 스페인 등 여러 갈래의 문명적 지류로 흘러나간다. -
동아시아는, 그러나, 문명사적으로 중국이라는 오로지 하나의 원천에서 문명의 샘이 솟아 중국이라는
오로지 한 줄기의 ‘대하’만이 흐를 뿐이었다.
최소한 서양의 열강이 ‘쇄국’의 빗장을 여는 19세기까지는 그렇다.
일본만이 약간의 독자적 문명의 길을 걸었을 뿐, 중국인들이 ‘네 오랑캐’(四夷: 東夷, 西戎, 南蠻, 北狄)라고 멸칭하던 한국, 베트남, 싱가포르, 만주 등의 주변국들은 소위 ‘한자 문화권’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우리로서는 유감스럽지만 결국 동아시아의 문명이라면 곧 중국 문명을 가리키는 셈이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은 중국의 역사를 한마디로 잘 설명하고 있다.
기원전 4,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리엔트 문명에 비해 중국은 출발도 훨씬 늦고
문명이라고 해야 보잘 것 없었다.
우(禹)가 하(夏 2205-1766 B.C.)를 세웠다지만 탕(湯)이 세운 상(商 1776-1122 B.C.)에서
중국사의 출발을 보는게 타당할 듯하다.
갑골문에 의한 기록이 상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상의 존재는 신화로 치부되어 오다가
1920대에 소위 ‘용골’이 발굴되면서 상의 실체가 드러난다.
상에 이은 주(周 1046∼771 B.C.)시대에 중국 문명은 싹트기 시작한다.
그들은 왕을 ‘천자’(天子)라고 부르고 ‘천명’(天命)을 받아 상을 멸했다고 주장한다.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시대였다.
‘사단’(社壇)과 ‘천단’(天壇)은 아직도 북경에 남아있다. 예(禮)의 개념이 생겨나고 만리장성의 축조가 시작된다.
시황제(始皇帝)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여 진(秦)을 세우고 1400마일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 202 B.C.-220 A.D.)나라 때부터 중국은 본격적인 제국의 틀을 완성한다.
사마천(司馬遷 ca. 145-86)은 신화적 분식을 없애고 오로지 사실에만 의거하여 사기(史記)를 저술함으로써
세계사상 최초로 역사서의 전범을 남긴다.
중국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의 일부인 종이와 도자기가 이 시대에 비롯된다.
가장 편리한 조리와 식사 도구인 젓가락도 역시 이 시대의 산물이다.
“심히 창대한 나중”은 바로 당(唐 618-907)나라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서유럽은 봉건제도하에서 찬란하던 헬레니즘의 문명은 모두 사라지고 원시적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위 ‘암흑시대’로 별칭되는 중세기였다.
당은 세계사상 가장 화려한 문명을 이루고 수도인 장안(長安)은 선진 문물을 구입하고 습득하려는
외국인들이 세계 도처에서 몰려와 북적거렸다.
로마는 멸망하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지만 중국은 제국이 일단 망했다 해도 이름만 바꿀 뿐
즉시 부활하여 영속했다.
사가들은 이 역사적 수수께끼가 여간 흥미롭지 않았다.
해답은 바로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과거제도에 있었다.
과거제도는 중국 문명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중국의 황제는 그가 천명을 받았다는 증거 즉 정통성의 근거가 인민이 그를 받아들이는가 마는가,
말하자면, 찬반의 여론에 달려있었고, 또한 행운이나 세습신분이 아닌 오직 실력 위주로 선발된
유식한 관료들에게 국정을 맡겼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정치의 보편적 가치로 정착시킨 1789년의 불란서 대혁명도
바로 중국의 과거제도에서 이념적 근거를 찾았다. ‘만민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니
실력만 있으면 촌부일지라도 하루 아침에 재상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세습귀족제도에 묶여있던 서양사람들에게는 동화와 같은 얘기였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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