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3학년 과제물로 제출된 글쓴이의 독후감이다.
방송대에서는 교수가 제시한 5-6종 정도의 도서에서 한가지를 선택하여 주어진 조건에 맞춰 리포트를
제출하면 학점을 주는 제도인데 한 학기동안 출석수업과 중간고사를 통하여 30%의 점수를 부여하고
리포트 점수를 70%로 책정하여 점수를 합산한 후 60점 이상이 되어야 이수한 과목으로 인정한다.
죽로산방에서 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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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열전(정범진외 옮김-까치)
열리는 말
중국은 신화시대로부터 문명을 태동시킨 장강문명과 황하문명시대를 거쳐 중국이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이전의 시기인 선진시기와 진한시기, 위진, 남북조, 수당, 송원, 명청시기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는 옛 신화시대부터 전한 초기인 기원전 2세기 말 한무제(漢武帝)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중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 사기열전이 동서양고전 1학기 과제물에 포함되어 있어 성균관대학교 중문학과 정범진 교수가 완역한 도서를 통해 접해보았다.
정교수가 완역한 사기열전은 왕과 제후, 그리고 역사에 기록될만한 행적을 남긴 영웅, 학자, 심지어 자객에 이르는 일반 서민들까지 다양한 인간상을 70편에 걸쳐 기술한 책인데 상, 중 하 총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상권(26열전)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손자오기열전과 오자서열전,
염파인상여열전, 여불위열전에 대해 독후감을 기술해 보겠다.
손무는 제나라 사람으로 병법이 탁월하여 오왕인 합려(闔廬)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군을 삼아
서쪽의 강국인 초나라를 무찌르고 북쪽으로 제나라와 진나라를 위협하여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 모두는 손무의 힘이 컸다. 손무가 죽고 나서 100년 후, 후손 손빈이 태어난다. 손빈은 병법에
능했으나 방연의 모함을 받아 두 다리가 잘리고 묵형을 당하게 된다. 허나 그의 재능을 익히 알고
있는 전기(田忌)가 제나라 위왕에게 천거하자 위왕은 그를 군사로 등용하여 위나라와의 전쟁에
참여시키는데 신묘한 계책으로 싸움마다 승리하게 된다.
자기를 모함한 방연은 막다른 골목에
곤궁에 처하게 되자 자신의 지혜로는 손빈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제나라 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위나라군을 전멸시키고 위나라의 태자를 포로로 잡아 귀국하였다. 손빈은 천하에 명성을 날리게 되었으며 그가 창안한 병법은 후세에 전해진다.
이름하여 손자병법이다.
오기는 위나라 사람임에도 노나라 증자에게 배우고 노나라 군주를 섬겼는데 병법에 능하고 용병을
좋아하였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의 군주는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아내가 제나라 여자라서 의심을 받게되자 아내를 죽이면서 까지 장군이 되어 전쟁에 나가
크게 이기지만, 자신의 명성을 위하여 아내를 죽였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런 소문의 이유로 노나라의 군주는 오기를 버렸다. 버려진 오기는 위나라 문후 밑으로 들어가
장군이 되고 명성을 얻었으나, 다시 버림을 받고 초나라로 가게 된다. 초나라에서 그는 재상으로
제수받아 법령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는 등 탁월한 능력과 병법으로 초나라를 강국으로
변모시켰지만 인접한 제후국에서 초나라의 강성함을 우려하여 오기를 미워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오기는 자신의 아내도 죽이면서 장군이 되어 명성을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아 그의 능력이 평가절하 되었음도 사실이다.
비록 오기가 잔인하고 이기주의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후세에서 그의 병법은 손자병법과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는다. 오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내를 죽여 장군이 될 정도로 집념이 강했지만
세상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만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행한 각박한 행동으로 뭇사람에게 지탄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손자오기열전은 손자와 손빈, 오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자질, 인간 본연이 가지고 있는 증오와
미움의 정서를 많이 부각시켰지만 아마도 이들이 가지고 행하였던 일들이 사마천, 자기 자신이
궁형을 당한 억울함을 열전을 통해 후세에 전달하고픈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을 운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형이 비무기의 참언으로 초평왕으로부터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복수의 일념을 안고 초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들어간다. 그 후 송나라,
정나라를 거쳐 오나라로 들어간 오자서는 태자 건의 아들인 승과 함께 5년여 동안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지으며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오나라왕인 합려의 부름을 받아 행인을 제수받고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우게 된다.
오왕 합려의 정복욕과 오자서의 복수심이 합쳐진 오나라 군사들은 BC506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 오자서는 원수인 초평왕이 이미 죽고 없자, 그의 무덤을 파해쳐 시신에다 채찍질을 300번 함으로써 복수하였는데, 굴묘편시(掘墓鞭屍)는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이러한 행동을 본 친구 신포서가 그의 행동을 나무라자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였는데, 여기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도 유래되었다.
오자서는 초나라를 함락시킨 공으로 신서에 봉해져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오왕 합려에 이어
왕에 오른 부차로 부터 버림을 받아 왕이 내린 보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한다.
이 오자서전에는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와 오월동주와 와신상담이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긴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전쟁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자서가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 왕의 시신에 매질을 한 행위는
혹독한 면이 없지 않으나 사마천은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을 유추해 보면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생의 모든 것을 건 삶, 그 자체가 허망하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조나라는 우연한 기회에 초나라의 진귀한 옥구슬 화씨벽(和氏璧)을 얻게 되는데,
강국인 진나라의 소왕(昭王)이 소문을 듣고, 진나라 15개의 성과 화씨벽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조나라는 강대국인 진나라가 두려워 큰 고민에 빠졌으나 사신을 맡은 인상여의 활약으로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진나라는 화씨벽 사건이 있은 이후 여러차례 조나라를 공격하여
승리자로서의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다시 인상여가 나서 모든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게 된다.
조나라의 왕은 이 일을 계기로 인상여를 상경(上卿)에 임명하게 되는데,
장군인 염파는 새파랗게 젊은 인상여가 자기보다
윗자리인 상경자리에 오르자, "염파는 세치 혀를 놀려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며
만나면 모욕을 주겠다고 공언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가 염파를 피해 다니자, 염파는 인상여를 향해 "겁쟁이고 계집같은 자"라며
업수히 여겼으나 인상여는 주위의 측근에게 "자신이 염파를 피하는 것은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하는 일이 먼저이고, 개인적인 체면문제이나 사사로운 원망은 나중의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이 말을 들은 염파는 인상여의 진심을 알고 사나이로서 부
끄러움을 무릅쓰면서 인상여의 집을 찾아가 사죄하고 화해를 청한다.
화해 후 이 두사람의 힘으로 조나라는 강국으로 변모하여 인근 제후국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나라가 된다.
인상여가 강대국인 진나라에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멸사보국하는 모습과
국가의 위급함을 생각하여 경쟁 관계에 있던 염파를 포용하는 태도에서 사사로움이 아닌 국가를
위하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한 인상여의 너그러운 인품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사마천은 이 열전을
통해 작은 일에 연연하기 보다 국가를 위해 무슨 일이 먼저인지 생각하게 하는 교훈을 주는것 같다.
여불위는 하남지방의 큰 상인이다.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여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
당시 국가 간 통행에는 별다른 제한이 없어 상거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여불위는 조나라 한단에 들렸다가 우연히 진나라의 태자인 자초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자초는 진나라 효문왕의 아들로서 조나라에 있는 진나라의 볼모였다.
진나라가 여러차례 조나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조나라는 자초를 그다지 예우하지 않아 거마와
재물이 넉넉지 못해 곤궁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여불위는 이러한 자초에게 다가가
진나라로 돌아가는 방법과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방법을 책략하고 같이 실행에 옮긴다.
여불위가 계획한대로 자초는 진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부왕인 효문왕(안국군)이 즉위한 지
1년만에 죽자, 자초가 왕위를 이었는데 이 사람이 효문왕이다.
자초가 왕이 되기까지 많은 공헌을 한 여불위는 승상으로 올라 문신후에 봉해지게 된다.
왕위에 오른 자초 즉,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인 정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가 곧 진시황이다. 정은 여불위를 상국으로 삼고 중부라 불렀는데 이때부터 여불위는
무소불위의 엄청난 권력을 얻게 된다.
이후 여불위는 자기의 식객들로 하여금 각각 식견을 쓰게 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아
[여씨춘추]를 편찬하는데 그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게 된다.
점차 장년이 된 진시황이 여불위가 자신의 소문을 막기 위해 태후에게 바친 노애가 환관이 아니라
어머니인 태후와 간통한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일로 노애가 기년궁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노애를 죽이게 된다. 여불위도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배척되자 참수가 두려워
독주를 마시고 죽음을 택해 생을 마감한다.
여불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다면 그 이익은 열배요, 보석을 사다 판다면 그 이익은
백배요, 사람을 사서 군주로 세움으로써 한 나라를 평정한다면 그 이익은 말로 할 수 없다.”
이 말을 빌리자면 여불위는 대담하면서도 계산적이고 치밀하게 군주를 세우는 책략으로 자초를
왕으로 만들어 권력을 장악하지만 태후와의 관계에서 탄생한 자기의 아들 정(진시황)으로부터
비밀을 감추기 위해 무리한 계책을 쓰다 스스로 몰락하는 우를 범한다.
진시황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불안한 왕좌를 여불위가 지켜주길 바랐고,
여불위는 어린 진시황에게는 왕좌를 지켜주는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성인이 된 진시황에게는
아버지인 여불위를 물리쳐야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근원이 마련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역사는 후세 사람들의 평가로 판단되지만 진시황이 여불위를 제거하고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을
보면서 절대권력은 언제까지나 영원하지 않고 진실은 언제가는 밝혀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맺으며-
우리에게 있어서 중국이란 어떤 나라일까? 지리적으로는 일본과 더불어 가장 가까운 나라이며
동시에 세계 3위의 거대한 땅덩어리와 정확하게 셀수도 없다는 엄청난 인구수,
차세대 세계경제발전의 동력이며 우리나라 제1의 무역상대국이기도 한 그야말로 거대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중국의 언어를
습득하고 그들의 경제개념과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중국을 완전히 이해했다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민족과 국가를 이해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은 3가지를 이해하는 것이라 했다.
바로 그 나라의 언어, 음식문화, 그리고 역사이다. 사마천은 70편의 열전을 흥미롭고 냉철하게
기술함으로써 그 시대에 살았던 다양한 인간상들을 엿볼 수 있었는데 잘난 사람들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못난이들도 많고 훌륭한 이들의 이야기도 있고 그렇게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그려냈다.
온갖 인간군상의 사기열전, 우리들은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여러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국인들의 통치이념과 생각을 살펴보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 중국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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