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문화의 정체. 차이 통합에 대하여...
1편에서 계속
당을 이은 송대(宋 960-1279)에 중국의 미술은 서양미술이 19세기 인상파가 등장할 때까지
사진기를 대용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생략과 변형’이라는 현대미술의 원리를 눈부시게 구현했다.
로마가 멸망한 원인중의 하나는 귀족들의 밥그릇이 납이었던 탓이기도 하다.
납중독-납이나 녹이 스는 쇠, 또는 나무로 그릇을 만들어 쓰던 서양 사람들에게 송나라의 도자기는 황홀한 보배였다. 15세기 말엽 서구의 상업혁명은 바로 ‘송자’를 사기 위하여 지름길의 해로를 찾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중국 또는 몽골 중에 어디로 귀속시켜야 마땅할지 모르겠는데,
원대(元 1279-1368)는 중국이 문명적으로 서양을 압도하며 훈습하던 시대이다.
화약, 종이돈, 인쇄술, 도자기, 피륙, 도박 카드, 의술, 미술 등이 서구로 흘러들어가 ‘양이’들을 교화시켰던 것이다.
명(明)과 청(淸)을 거치면서 중국은 서양에 문명 수준이 급속하게 뒤떨어진다.
서양이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있을 때 중국은 미신과 복고주의에 빠져 퇴락하고 있었다.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는 중국의 몰락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결정타였다.
서구문명과 중국문명은 어떤 차이와 우열이 있는가?
한국은 중국과 문명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또 그들의 문명적 그늘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다음 마지막 두편에서 다루어질 주제들이다.
4. 동서양은 문화적 경쟁에서 누가 이겼을까?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역설했듯이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리가 지배적인 조건이 된다.
그리스는 해양 국가였고 반면 중국은 내륙 국가였다.
바다와 땅이라는 지리적 차이가 차후 2천년 동안 세계의 양대 문명의 흐름을 정반대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을 바다를 넘나들며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항구는 도시를 형성했다.
반면 중국은 농사를 짓고 가족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이루어 졌다. ‘상업 또는 도시 국가’ 대 ‘농업 또는
가족 국가’라는 대칭이 성립하는 것이다.
상인들은 손익계산이 민첩하고 항해가들은 정확한 항로를 찾아야 하므로 그들은 자연에서 수리와 질서를 보았다.
사고방식은 논증적이다. 논증은 또한 분석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쪼개서 본다.
양분법은 서양인들의 사고의 기본이다. 논증은 자연과학, 소위 ‘물질문명’을 발전시킨다.
반면에 농민들은 철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자연에서 신비를 느끼고 산수의 경승에 도취한다.
자아는 자연에 몰입되어 주객의 구별이 사라진다. 서양인의 양분법과 대조적으로 동양인은 우주를 하나로 본다.
우주가 곧 신이므로 창조주가 따로 없다.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하는 주장은 그래서 일리가 있는 것이다.
사고방식은 직관적이다. 직관은 이치로써는 따질 수 없는 예술, 종교 등 소위 ‘정신문명’을 발전시킨다.
직관은, 그러나, 발명에 한계가 있다.
중국인들은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장인의 직감으로 도자기까지는 구워낼 수 있었지만
치밀한 계산과 정밀한 측정이 요구되는 철마는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이후 중국의 문명은 서양에 급속하게 뒤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양인들은 항상 새로운 문물을 만나고 새로운 문물은 호기심을 자극하여 다시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게 한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보물섬을 틀림없이 찾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농업인들은 문제에 봉착하면 항상 해답을 과거의 농법 또는 경험에서 찾으려 한다.
과거지향적 또는 반동적인 성향이 뿌리 깊었으므로 발명을 기피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나라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던 것이다. 이를 쇄국정책이라 한다.
동아시아인들이 공자 맹자만이 절대 진리로 착각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서양 문물은 철저히 외면
또는 배척하고 ‘공자왈 맹자왈’만 개구리 울듯 외고 있는 사이에 서양인들은
그들 특유의 진취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유교와 불교를 배우고 익혔다.
기절초풍하게도 동양학에 관해서 자료나 전문가는 유럽이나 미국 쪽에 더 많으니
동양사람이 불교 또는 유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구미의 대학으로 유학가야 하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월하다고 자처하던 ‘정신문명’도 서양인들에게 다 뺏기고 만 것이다.
중국인들이 오랑캐라고 하는 기준은 예(禮)에 있다.
외국인들은 예의를 모르니 모두 오랑캐라는 것이다.
‘가족 국가’의 예의는,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시화가 대세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무례가 되는 수가 너무 많다. 예컨대 선착순으로 줄을 서는 도시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연장자 또는 상급자라고 해서
차례를 무시한다면 엄연히 ‘새치기’인 것이다.
주한 미군들과 보면서 감탄한 것은 그들의 예의가 무지 바르다는 것이었다.
우리 병사들은 제 식구만 챙기는 가족 국가의 관습대로 자신보다 높은 계급자일지라도
직속상관이 아니면 무시하기 일쑤인데 그들은 장교이면 외국인일지라도 반드시 예의를 갖추었다.
집안에는 어른들에게 아주 공손하면서도, 말하자면 가족끼리는 예의가 아주 바르면서도,
밖에만 나가면 공중도덕을 외면하는 행태는
예의를 중시한다고 자처하는 동양인으로서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공중도덕의 관점에서 중국인들이 얼마나 무례했으면, 옛날 얘기지만,
“중국인과 개는 입장 금지”라는 팻말이 공원 입구에 붙었을까!
예의의 측면에서도 서양인들이 훨씬 우월하다.
지금은 동서양이 모두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룬 상태에서 두드러진 문명적 차별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다.
다만 전통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동서양의 문화적 경쟁은 서양의 절대적인 승리,
동양의 참담한 패배로 끝난 것이다.
5.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국사를 읽다 보면 우리나라는 도대체 언제 입원한지도 모른 채 무기한 병상에 누어있는 뇌사 환자처럼 여겨진다.
병력의 기록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죽간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수천년은 좋이 된 듯하다.
숨이 수시로 넘어갈듯 하다가도 신비롭게도 끊기지 않고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목숨을 부지해온 것이다.
기적적으로,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열심히 돈을 벌어 세계 십대 부자 반열에 오르고
뛰어난 가무 실력으로 세계 도처에서 광팬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도대체 그의 병인은 무엇이었을까? ‘위화경물중문’(爲華輕物重文)이었다. (도가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양주의 주장 ‘위아경물중생’(爲我輕物重生)을 패러디한 것이다.‘이기주의적이어서 나라의 흥망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제 목숨만 부지하면 장땡’이라는 뜻이다.)
위화(爲華) 우리의 선조들은 중국의 주술에 홀딱 걸려있었다.
중국을 흠모하고 따라 배우며 모시는 것을 최대의 영광이며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문 말고 다른 ‘요상한’ 글을 만들어 쓴다는 발상은 ‘신성 모독’이었다.
최만리는 그래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를 결사반대했던 것이다.
구한말의 거유 최익현은 목숨을 걸고 개화를 반대했다.
중국의 문물 이외의 것은 모두 사악한 것들이었으므로.
여기서 우리는 왜에게서 배워야 한다.
7세기 초 왜의 군주 성덕태자는 발신인 ‘일출처의 천자’와 수신인 ‘일몰처의 천자’를 명시한 편지를
중국황제에게 보냈다.
712년의 고사기, 720년의 일본서기는 사료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중국보다 앞선 연대를 매기고
중국보다 위대하고 유서 깊은 나라임을 자처하고자 했던 왜인들의 의지를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들의 자주적 국가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의 최초의 사서인 삼국사기(1145년)는 유감스럽게도 모화사상 또는 사대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자주독립의 의지가 없는 민족은 살아남을 수 없는 법인데 우리가 반쪽이나마 나라의 모양새를 유지하며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우리 민족은 부흥하려면 자주적으로 의식화되어야 한다.
경물중문(輕物重文) 양반들은 풍월을 뺀 다른 일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물’은 시문을 제외한 모든 행사(行使)를 가리킨다.
양반이라면 시문이나 짓고 읊을 일이지 아랫것들이나 하는 ‘물’에 간여한다면 체모에 손상이 가는 것이었다.
‘사농공상’ 중의 하위 세 계급은 노예 신분이나 다름이 없었고, 인명을 다루는 의원을 비롯하여, 화원, 세리, 별감 등 국정의 실무 관리들도 합당한 대우를 못 받는 중인 신분이었다.
심지어 나라를 지키는 무관들도 문관들로부터 천대받았다.
신축교난 당시 관아의 무기고를 열어보자 활과 창은 다 녹슬고 썩었더라는 기록이 있거니와,
우리의 군대는 오합지졸의 명색뿐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왜한테서 배울 바가 많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를 천황, 장군, 대명(大名-다이묘) 등 최상위 지배층을 빼고는 가장 우대했다.
심지어 사무라이는 자신에게 불손하게 대하는 평민은 현장에서 처치할 수 있는 ‘살인면허’까지 부여받았다.
무사의 우대는 왜의 전통이었다.
천황은 1868년 명치유신을 계기로 역사상 처음으로 친정할 때까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쇼군(将軍)이 나라를 실무적으로 통치하였다.
왜의 군사력은 임진왜란 당시는 중국을 압도하고 제2차세계대전 당시는 사실상 세계 최강이었다.
강력한 군사력은 과학기술과 경제의 발전을 전제하거나 수반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무사를 우대했다는 말은 ‘테크노크라트’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물후문’(先物後文)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가 5천년 동안 뇌사 상태에 빠져있던 제1의 원인은 뭐니뭐니 해도
‘실사구시’를 배척하고 ‘공리공론’으로 허송세월했던 탓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사고방식과 국가정책을 과학기술의 발전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경문중물’(輕文重物)을 지향하자는 뜻이다.
일부 대학교에서 인문대학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바로 이런 역사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문학은 요란찬란하게 대학 강의까지 들을 필요 없이 자습으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
게다가, 인문학은 알면 유식하다는 평판을 들어서 좋겠지만 모르고 지내도 별 탈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적 원리는 배워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천적인 것이니
선택 받은 지도자라면 직관적으로 깨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박정희는 배운 것이라고는 총질 밖에 없었지만 한강의 기적을 연출할 만큼 지혜롭지 않았는가!
나는 박태준을 특히 교육적인 면에서 높이 본다. 그는 대학을 공대에 국한시켜 설립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 공연되지 않은 역사의 시나리오를 미리 훔쳐본 것이다.
천기누설로 지옥에 빠질 것을 각오한 듯하다.
계속 작성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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