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스물두번째 날

sunking 2013. 11. 10. 11:42

 

산티아고 순례길 - 스물두번째 날
 
룸메이트는 28km 걷기 위해 새벽같이 떠났고, 16.8km 만을 걷기로 한 나는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아침을 즐긴다. 숙소에 딸린 바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갓 구워낸 토스트에 버터와 쨈을 듬뿍 발라 그 맛을 음미한다.
스페인의 버터는 정말 맛있다. 그리고 신선하다.
7시가 조금 지나자 이 마을 주민같은 아저씨들이 하나 둘 모여들며 바는 시끌 거린다. 이리되면 난 일어서는 수 밖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영광의 도시 사하군, 오늘은 그 도시를 향하여 출발이다. 산 베니토 수도원의 적극적인 참여로 왕위에 오른 알폰소 6세는 그 보답으로 엄청난 돈을 이 마을에 지원하게 되고, 11-12 세기의 사하군은 전성기를 맞으며 영화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그 영화도 잠시,
18세기에 대형 화재로 도시와 수도원은 화마 속에 사라졌고,
지금은 그 수도원의 정면이던 아치만 남아 외롭게 옛 영광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라는 그 곳을 향해 가는 길,
날씨조차 구름이 덮여 희미한 기억 속의 옛 도시를 찾기에 한 몫을 할 것 같다. 까미노 길에서 몇 안되는 버스가 서는 도시, 나는 어제 생각대로 사하군에서 버스를 타고 레온까지 갈 예정이다. 메세타의 맛도 120km 넘겨 걸으며 봤고, 어차피 나머지 60여km의 길도 변화없는 광활한 하늘과 밀밭일 것이고, 서울에서 날아오는 문자, “너무 지치게 하지 말고 버스도 타세요.”라는 권고의 말.
내가 버스를 타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버스를 탄다는 건, 순례자의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라고 단호하게 외치던 독일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나의 이기심 - 걷는 길 내내 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오늘의 길은 다른 메세타 지역과는 조금은 다른 것 같다. 작은 마을들도 만나고, 나무 숲도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마을 앞의 바, 쥬스 한잔 마시고 나오던 입구, 문 앞에 서 있던 아저씨가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본인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왔고, 혼자서 걷고 있는데 지금 자기가 어려움에 처해 있단다.
현금은 가진 것이 없고, 들고온 카드가 부러졌단다.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라며 난감해 한다.
바로 며칠 전 들고 간 카드를 사용 할 수 없어 난감해 했던 순간이 떠 오른다. 그럴 때 무엇이라 답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당황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방법이 없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없는거야. 이 길에 독일 사람들도 그리 많더니. 할 수 없어. 누군가가 좋은 방법을 줄 수도 있을 거야. 혼자 속으로 궁시렁 거린다. 떠나야 해서 미안하단 말과 함께 “아마, 하느님이 당신의 순례 길에 방법을 찾게 해 주실 겁니다.
좋은 일이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저 아저씨에게 기적처럼 도움을 주는 천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께름할까?
내가 저 아저씨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었을까? 걷는 내내 오늘은 그 아저씨 일로 마음이 편칠 못하다. 떠나는 나를, 망연자실 바라보던 그 모습도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내 안에 들어가 나와 만나는 즐거움의 시간을 뺏어 간 그 아저씨에게 짜증도 났지만 지독한 이기심에서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슬퍼지기도 했다. 세월의 향기를 느끼게 해 주던 골목길 - 멀리 떠난 친구가 그리워 지던 길 사하군을 들어 가는 초입, 예쁜 돌다리와 작지만 아담한 성당이 보인다.
다른 마을에서 보던 웅장하고 위엄있던 성당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성당 주변엔 공원처럼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쉼터가 있고,
오랜만에 보랏빛 꽃도 만났다. 아치 문을 지났다. 사하군을 지나는 순례자들을 축복해주는 통과의례를 거친 느낌이었다.
환영이라도 받은 듯 기분이 좋다. 시내를 들어가기 까지도 한참을 걸었나보다. 번화 하지는 않았지만 꽤 규모가 있는 도시였다.
예약했던 알베르게는 호텔과 알베르게를 같이 갖고 있는 깔끔한 곳이었다.
 
어제 독일인 아저씨가 최고라며 강추 하던 곳이기도 하다. 내 배낭이 없다. 전화를 해 보니 시립 알베르게에 갔다 놨단다.
왜냐고 물어봐야 나름대로 이런저런 변명이 있을 것이고, 시시비비를 따지기엔 말이 짧아 언제나 포기다.
다행히 500m 정도 떨어진 곳, 배낭을 찾아 놓고 시내로 나간다. 그러고 보니 우왕좌왕하다 아직 점심도 먹질 못했다. 파스타 집이 눈에 띈다. 늦은 오후라 식당엔 나 혼자다.
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시켰더니 그건 할 수 없단다. 파스타를 시켰다.
오랜만에 따듯하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은 것 같다. 다만, 오후 내내 갈증으로 맥주를 두 캔이나 마셨다. 음식이 너무 짰던 가 보다.
예쁜 빠가 있고, 꽃집이 있고, 앙증맞은 애기 옷이 진열된 상점이 있던 곳, 거리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한다.
 
안정되고, 정돈된, 편안한 거리였다. 오래 된 집들이 모여 있던 골목 길,
그 속에서도 세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던 곳이기도 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이가 들어 한가한 시간이 오면 산에도 가고, 여행도 함께 떠나자던 수십년지기인 친구,
그 친구는 먼 외국으로 떠났고, 주고 받은 내일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겐 없다.
내일을 알 수 있다면, 한 치 앞이라도 알 수 있다면 많은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는 않을텐데.
서늘한 바람 한 줄기 가슴을 스쳐간다. 맥주 한 잔 놓고 앉아 친구와의 길고 긴 시간들을 기억해 본다.
배가 부른 젊은 임산부가 사랑스럽다 맥주를 따라주며 따듯이 웃어준다.
엄마의 부른 배가 장난감인지 아는지, 서너살 꼬마가 엄마 배를 북치듯이 둥둥 쳐 댄다.
 
과일과 음료를 사러 갔던 슈퍼의 주인 아저씨, “다 고르셨습니까?” 라며 완벽한 한국말로 나를 놀라게 한다.
“한국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 하세요.” 라는 질문에 “손님들한테 배웠습니다.” 어떤 손님이었을까.
어휘는 물론 상당히 수준 있는 말을 가르쳐 주고 간 그 손님이. 내일 아침 타야 하는 버스 정류장도 찾아 가 본다. 그곳이 가장 중심지였던지, 버스 정류장 앞에 견고하고
큰 성당이 있었지만 들어가는 문은 닫혀 있어 외관만 이리저리 구경을 하고 숙소로 돌아 오던 길,
어디로 가는 기차 길일까? 어디에서 채벌한 나무들일까? 화물칸에 가득가득 쌓여있는 벌목한 나무들이 실려있고,
길게 뻗은 평행의 선로가 놓여 있다. 이 곳은 저 통나무를 실어 온 종착점일까, 아니면 시발점일까. 기
차는 언제나 아련한 추억도 함께 실어가고 실어 오는가 보다. 희미한 모습들이 그 속에 함께 어른거린다. 오늘부터는 완벽하게 나는 혼자다. 만나고 헤어지던 일행들은 모두 앞으로 떠나갔고 오늘 이 알베르게에도
내가 아는 얼굴은 한 사람도 없다. 간단한 눈 인사, 작은 미소,
그것도 외로움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될 수 있음을 알게해 주심에 감사했다. 어쩌면 이 길이 끝나면 나는 작고 가난한 겸손의 사람이 되 있을 것 같다. 희망사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