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스물 한번째 날

sunking 2013. 10. 30. 21:41

 

메세타의 얼굴을 만나다

카리온의 여명








하늘은 여명으로 붉게 물들어 온다. 어제 저녁 끈질기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상큼한 아침 바람이 싸늘하다.
어젯밤 몸살, 감기가 오는가 싶게 으슬거리던 몸 컨디션은 씻은 듯 개운하다. 따듯한 방에서 잠자리가 편안 했던가보다.

카페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난다. 6시 50분, 뒤돌아 보고, 또 보며 구름이 아름다운 하늘을
사진에 담는다.
“카리온은 어땠어.” 새들이 따라오며  물어 댄다.
“따듯했어. 몸도 마음도. 며칠동안 추위에 얼었던 몸이 다 녹을만큼. 수녀님들의 온화한 기운이 고향 집에 있는 것 같았어.”

새들은 조잘대며 동행을 한다. 밤 9시 소등이 되고, 언듯 수녀님들의 밤 기도 소리에 잠이 깼는가 싶었는데,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다시 잠이 들었던가 보다. 새벽까지.
오늘의 목적지인 래디고스까지의 구간엔 한 개의 마을밖엔 없다.  그리고 목적지다. 17km 구간, 이 곳엔 먹거리를 구할 바도 상점도 없다.

아득한  수평선, 하얀 뭉게구름, 태양, 그리고 바람.









끝없이 이어지던 밀밭이 수평선을 이루는 곳,
아름다운 구름과 멋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
구름처럼 피어났다 스러지던 길고 긴 옛 이야기들의 실타래를 풀어 놓을 수 있는 곳,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던 바람과의 교감이 이루어 지던 곳,
그건 메세타에서만 누릴 수 있던 특별한 시간.
오늘따라 뻐꾸기의 애절한 울음이 그치질 않는다.
푸른 초원 같은 밀밭, 어디에서 뻐꾸기가 날아 든 걸까.
마음이 바늘에 찔리듯 자꾸만 따끔거린다.
광활한 하늘과 부드러운 흰구름이 나의 아픔을 다독여 준다.



커피와 몇 개의 과일을 놓고 파는 간이 바가 두 군데, 순례자의 쉼터 노릇을 하고 있다. 봉고 차가 커피를 만드는 주방이 되고,

작은 탁자 하나가 간단한 과자와 과일의 진열대가 되고 있다. 그곳에서 목을 축이고, 간이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힌다.

17km를 걷고 만난 마을 입구, 벤치에 앉아 바람맞이를 한다. 고개를 활찍 젖히고 바라 본 하늘,
솜사탕 같은 구름이 하얀 꽃처럼 피어났다 스러지곤 한다.

후원이 아름답던 래디고스의 알베르게, 햇님과 숨바꼭질을 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하던 하늘이 조금씩 구름이 드리워지며 래디고스를 찾아 들어간다. 내 옆에서, 뒤에서 오던 모든 순례자들은

다 앞으로 가고 나 혼자 걷고 있다. 슬금슬금 두려움이 밀려든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걸까, 내가 가고 있는 길은 맞나? 

갑자기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노란 화살표도 보이지 않고 가리비 문양의 표시조차 눈에 띠지 않는 시골 벌판 길이다.

어디선가 나타나는 사람의 그림자, 그들은 하느님이 보내준 나의 길잡이,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갑다.

언덕의 오르막과 내리막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멀리 마을 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래디고스는 작고 초라한  마을이다.
하지만 알베르게는 편안했고, 빨래를 해서 널 수 있는 뒷 마당은  넓고 시원스럽다. 작고 앙증맞은 하얀 마가렛이 보료처럼 깔려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늘은 숨바꼭질을 하듯 들고 나며 햇빛과 비를 번갈아 내려 준다.
빨래를 걷었다 널었다, 우리도 햇님과 숨바꼭질을 한다.

간이 바에서 만났던 독일인 아저씨가 까미노 순례길에 대해 열강을 하고 있다. 가끔 만나는 입담좋은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때론 훌륭한 정보가 되지만, 때론 내 목표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반드시 묵어야 할 마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곳,등에 대하여.

그는 모리나쎄카의 계곡 물소리와 사모스의  베네딕트 수도원 사제들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기억 하라고 몇번이고 당부 한다.

이번이 네반째, 산티아고를 걷는 이유는 그 곳에서 만났던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감동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고,

올 때마다 그 곳에서 얻는 감동은 자신에겐 충격이라고 했다.
사하군에서 레온까지 50km는 버스를 탈 예정이라니 그는 깜짝 놀란다. 어떻게 건너 뛰어 버스를 타느냐고,
그건 까미노 순례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대충 얘길 듣고 일어선다. 사업차 가끔 한국에도 온다는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독일인과는

이미지가 다르다. 상당히 수다스럽고 수선스럽다. 오래 앉아 있다가는 뭔가 헷갈릴 것 같다. 일어나 빨래터로 나간다.

저녁 식사 시간엔 약간은 어눌한 불란서 아줌마를 만나고,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꽁지머리 발레리노라는 사람도 만났다.

불란서 아줌마는 일정이 있어 레온까지만 걷고 불란서로 돌아 가야 한단다.

박물관에서 일을 한다는 그 양반, 그 불편한 몸으로 (외모로 봐서는 중풍이 지나갔지 싶었다) 순례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놀랍기만했다.
오늘 밤으로 카스트로헤리스에서 만난 대구 자매와는 이별이다. 아무래도 난 내일 사하군에서 버스를 타야 할까보다.
자매는 사하군에서 12km를 더 가기로했다. 그러고 보니 자매와는 68km, 나흘 밤을 함께 보냈다. 산티아고를 오기 위해 스페인어까지

공부한 철저히 준비된 순례자, 그 치밀함과 철저함이 존경스럽다. 스페인 현지인들과 소통이 가능한 자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감사했던 나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