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근 이중섭을 만나보다
화가 박수근과 이중섭의 작품세계를 만나보려 덕수궁을 찾았다.
그동안 시청 앞 주위를 많이 다녔지만 덕수궁 정문이 있는 대한문 앞으로 가보기는 실로 오랜간 만이다.
얼마전 쌍용자동차 노조가 철야농성한다고 천막을 치고 시위를 하는 바람에 눈살도 찌푸려지고
별반 관심도 없어 눈길 한번 안주었던 곳이다.
옛날 고등학교 학창시절, 토요일, 일요일만 되면 이젤과 그림물감을 싸들고 이곳을 찾아 하루종일 그림 그리면서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그 당시 그림을 같이 그렸던 친구들이 대학교수로 많이들 봉직하였다.
날씨도 쌀쌀하고 하늘도 찌부둥해서 그런가? 기억이 분명한 곳인데도 하여튼 낯설다.
대한문 입구에서 수문장 교대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사람들도 그렇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신기한듯 교대식 광경을 보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 생긴 새로운 풍습(?)들이다.
막상 찍어놓고 집에가서는 보지도 않으면서 찍는데만 열심이다.
낙엽을 밟는 소리도 좋고, 비처럼 내리는 나뭇잎을 맞아보며 걸어보는 것도 좋으련만...
그래! 그렇게 찍어서 뭐할껀데?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하면 온갖 것 다 나오는데.... 말이다.
수문장의 표정이 사뭇 근엄하고 북소리와 태평소 소리가 한국적인 멋을 더해준다.
노오란 은행잎이 꽃잎처럼 우수수 떨어지며 바람을 타고 흐르고, 궁궐 지붕의 처마선이 단풍나무에 걸려
붉게 물들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많은사람들로 가득하다. 줄도 길게 늘어서 있다.
<한국 근현대회화 100선>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1920년부터 70년대까지 그려진 한국의 명화 중에 걸작품 100점을 엄선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일제와 해방, 한국동란을 거처 4.19, 5.16의 혁명과 빈곤이 넘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이다.
글쓴이도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때 부터 시작했으니 1959년도다.
그 당시 그림 그리는 사람이나 음악가, 문인들이 곤궁한 삶의 밑바닥에서 고통 받았다고들 하는데
우린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학생이었으니 생계를 책임져야할 가족이 없고 그림 지도하셨던
은사님의 친구분(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다들 멋쟁들이라서 그런지, 그때는 그 말이 별반 피부에 와 닿지를 않았다.
박수근과 이중섭의 작품들은 그야말로 눈물로 그린 그림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작품집에 기록된 작품세계를 통하여 그들의 힘들었던 삶의 궤적을 더듬어보자.
박수근은 1914년, 이중섭은 1916년에 태어났으니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온 몸으로 겪으며
겨우 40-50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림을 그려서 돈이 되는 것도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그리다가 가난하고 병든 몸으로 스러져간 선각자들이다.
이중섭이 전쟁 중에 부인과 아들 둘을 데리고 살았던 서귀포의 초가집은 이제 그의 기념관이 되었다.
네 식구가 묵었던 방은 정말 네 식구가 드러누울 수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작은 방이다.
이중섭은 이곳 바닷가에서 천진하고 장난끼가 잔뜩 묻어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여러 점 남겼다.
이웃들이 건네주는 식량으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결코 가난에 침몰되지 않은 열정적인 창작력을 가지고 있었던 화가였다.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천재화가니 뭐니 그랬겠지만 당시에는 무능한 가장,
완전 그림에 미친 사람으로 회자되었을 것은 분명할 터.
박수근은 제대로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오직 독학에 의존했던 강원도 양구 출신의 가난한 화가였다.
6.25종전 후, 용산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꾸렸지만
언제나 물감 살 돈이 부족하여 곤궁하게 지냈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군 한명이 약간의 도움을 주어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는데 박수근은 고마움의 뜻으로 본국으로 귀환하는 그에게 작품 하나를 선물했다
그 미군은 그림을 가방속에 아무렇게나 싸서 짐짝처럼 가져갔다.
이 작품이 수 십 년 후, 한국경매 사상 최고가(45억2천만원)를 기록한 <빨래터>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햇을 것이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지 40여년. 전시장에는 두 사람의 특별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박수근의 빨래터라는 작품은 클 것이라 여기지만 3호 정도(엽서3장 크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려고 한시간 정도 기다려야 볼 수가 있다고 하니 실로 격세지감이 있다.
그들이 살아온 가난한 삶의 흔적을 볼 때 엄청나게 호강을 누리는 셈이다.
박수근이나 이중섭, 두 사람은 살아 생전에 배부르게 살아본 적도 없고 명성을 날리지도 못했다.
이중섭은 1955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몇 작품이 팔렸다고 좋아했지만 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더러는 받고 더러는 떼여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를 못했는데도 오로지 그림만 그리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전시장에는 두 화가 이외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57인의 작품도 만날 볼 수 있다.
100점의 작품을 돌아보며 느끼는 것 첫번째 화두는 소박함이다. 맑고 곱다. 한마디로 결이 고운 것이다.
화려한 필치도 아니고 웅장함도 현란함도 찾아볼 수 없다.
가난하고 찌든 삶 속에서도 예술혼을 살리면서 묵묵하게 한국 미술을 이끌어 온 많은 작가들이 경외스럽고 아름답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추워지겠지...
늙은 가을이 많이 쇠잔해졌다.
죽로산방에서 서pd
이중섭의 작품
박수근의 작품들
박수근의 젊은 시절. 왕성한 작품 생활을 할 때이다.
박수근 作 빨래터-한국 경매사상 최고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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