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야~ 그대로 있어줘 고마워

김영갑작가 -갤러리에서


봄맞이 제주 여행길에 올랐다. 봄과 겨울, 두 계절을 동시에 갖고 있는 2월,
마지막 눈으로 눈꽃을 피우는 한라산 눈꽃도 보고,
이르게 피어난 수선화와 유채, 동백과 매화도 만나리라 기대 했지만,
이번 여행길 첫째 주제는 ‘오름’이다.
제주에 크고 작은 화산이 터지며 만들어 낸 분화구, 오름이 368개가 넘는다고 한다.
10년도 더 전, 내가 처음 만났던 다랑쉬 오름은 알고 보니
제주의 대표적인 여왕 오름이라 했다.
오름 정상에 올라, 마주친 분화구의 뻥 뚫린 거대한 굼부리.
그대로 풍덩 던져질 것 같은 아찔함이 있었지만 다랑쉬 오름과의 첫 만남 이후
오름은 내게 그리움이다. 동서남북 크고 작은 구릉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던
아스라한 오름의 능선들, 그야말로 제주는 오름으로 시작해 오름으로 끝날 것 같았던
아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행 첫째 날 : 노꼬메 오름을 오르다





이번 여행길에서 네 개의 오름을 올랐다.
한라산 백록담이 구름 속에서 나왔다 들어 갔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한눈에 보게 해 줬던 애월읍에 위치한 노꼬메 오름. 나의 첫 기억에 남아 있는
다랑쉬 오름이 제주 동부 지역의 대표 오름이라면,
제주 서부 지역의 대표 오름은 노꼬메 오름이라 했다.
명칭에 대한 정확한 정설은 없지만 사슴이 살았다하여 鹿高 산이라 부르다가
노꼬메로 됐다고 한단다.
전국이 황사와 미세먼지로 덮인다는 예보대로 도착한 제주하늘도 희뿌연 모습,
가슴까지 답답했지만, 우리 여행 도반 가운데 누구의 공덕이었을까.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던 애월 물메골 식당의 연잎 밥을 점심으로 먹고 나오자
하늘은 열리고, 그림 같은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노꼬메오름 오르는 입구는
숲길로 시작을 해 우리가 알고 있는 오름하곤 느낌이 달랐지만
정상으로 오르며 시야가 트이고 크고 작은 오름의 능선들이 깔리며 역시 ‘오름’맞네 싶다.
한라산이 전망되던 곳, 백록담이 순간의 요술을 펼쳐 보여주던 곳.
오르는 초입의 가파른 경사에 숨이 차긴 했지만, 산길이란 크든 작든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충만함이 있어 그 맛에 빠져들곤 하는데,
오르기가 힘겨울수록 보상처럼 주어지는 그 맛은 더욱 깊다. 정상 쉼터에 앉아
땀을 식히며 능선의 부드러움이 주던 편안함에 젖어든다.
여행 둘째 날 오전, 따레비 오름을 오르며








둘째 날, 아침은 꾸물꾸물 하늘이 흐리는가 했는데,
햇살이 퍼지며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맑았다.
오늘은 따레비 오름, 용눈이 오름, 다랑쉬 오름, 세 개의 오름을 오른다.
어제의 노꼬메 오름과는 달리 오늘 따레비 오름은 유연하고 완만하여 발길을 놓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한 걸음을 걸어도 좋다했다. 제일 높은 할아버지 오름을 중심으로,
장자 오름, 며느리 오름, 손자 오름등, 오름 일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곳,
할아버지 오름을 제주 방언으로 따레비 또는 따라비 오름이라 부른다 했다.
하늘에 피어오르던 구름도 오늘따라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이리저리 바람에 흘러 그려내는 그림. 언제라도 살갑게 손을 내미는 친구 같다.
완만한 능선 길을 걸어오고 있는 도반들의 모습이 아스라이 펼쳐진 한 폭의 산수화다.



용눈이 오름에서 바라다 본 다랑쉬오름





둘째 날 오후 - 다랑쉬 오름의 노을빛을 찾아서
오후 제주 동쪽 지역의 대표 오름이라는 다랑쉬 오름을 찾기 전
다랑쉬 오름의 맞은편에 있는 용눈이 오름을 맞보기로 올랐다.
제주 중산간의 자연을 사진에 담아내는 것을 필생의 작업으로 알고 살다 떠난
김영갑 사진작가에게 가장 큰 영감과 혼을 심어 준 용눈이 오름은
다랑쉬오름과 함께 중산간의 위치한 오름의 대표가 된다 했다.
눈을 뜨면 카메라를 메고 용눈이 오름을 찾았다던 김영갑 작가의 혼백은
이곳 하늘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고 있지는 않을까.
두모악 갤러리에 걸려있던 작가의 모습, 해맑은 영혼의 빛과 마른 풀냄새가
날 것 같던 그 모습이 자꾸 눈에 어린다.
용눈이 오름 중턱에서 바라다 본 다랑쉬오름은
‘비단 치마에 몸을 감싼 여인처럼 우아한 몸맵시가 말쑥하다’는 오름 나그네
김종철 선생의 말대로 였다. 벌판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그 모습은
제주시민이 가장 아끼고 보존하고 싶다는 ‘오름의 여왕’답게 단아하고 고고하다.
다랑쉬 오름에서 석양을 보겠다는 일정 계획은 적중.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거세고 싸늘했지만, 서서히 물들어 가는 노을빛의 하늘, 티 없이 동그란
석양의 노을빛 속으로 도반들 모두가 녹아드는 듯, 말을 잃는다.
겹겹이 이어진 오름의 능선들이 푸른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질 무렵
그 감동을 안고 내려선다.
짧지만 긴 제주의 2박 3일




2박3일이란 시간은 제주를 맛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봄이 오는 초입의 오름 맛을 보았고, 산호빛 투명한 표선 바다 물빛을 만났고,
지금쯤 남도의 고택들과 산사에 만발했을 매화를 이곳에서 만났다.
돌담길이 한가롭던 하가리 마을에서 매화와의 만남은 첫째 날 중식 후.
“아, 이곳에서 매화를 보네.”
떨어졌던 오랜 친구를 먼 여행길에서 만난 듯, 반가웠다.
노을을 찾아 나섰던 모슬포항의 스산했던 석양과 바람에 날리던 유채꽃도
슬픈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인상적이었고,
그 긴 여운을 안고 한라산 청정한 휴양림 숙소로 도착한 시간은 어둔 밤.

김영갑 갤러리에서 - 구름을 소재로 찍은 사진 전시 - 테마가 바뀌며 작품이 전시된다함
두모악 갤러리 돌담 아래서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 입구
바다가 보이던 해녀들의 식당 -조개죽이 일품이었다


둘째 날,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에서 만났던 빨간 홍매, 바다 빛으로 펼쳐졌던
하늘 속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빵빵하던 꽃망울은 점점이 하늘에 박힌 보석.
갤러리의 숨겨진 커피 집 통유리 속에 가득했던 싱싱한 푸른 숲.
위미 마을 동백의 반짝이던 꽃도 아름다웠지만, 도반들을 미소 짓게 했던 떨어진 꽃으로
돌담을 수놓았던 알 수 없는 예쁜 마음.
그건 제주가 가슴에 그려 넣어 준 잊지못할 그림들이다.













올라 갈땐 좋았는데, 바위타기 훈련중


셋째 날, 추사 유배지를 찾아 가던 날, 조림된 백매와 홍매 밭을 찾아
매화 향에 흠뻑 취해 보기도 했고.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은근히 기대했던 한라산의 눈꽃을 만나진 못했지만
마음속에도 눈 속에도 제주는 고스란히 박혀져 왔다.
추사 유배지의 다소곳하고 단아해 보이던 돌담아래 수선화의 모습도,
세한도 그림에 유래된 추사 김정희와 이상적선비의 가슴 찡한 우정도,
그 모든 것이 봄이 오는 길목 제주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얘기들이다.

이 차 밭 뒤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면 숲길이 나옵니다.


이번 여행 길, 마지막에서 만났던 곶자왈 숲길에서의 천리향 향기도 오래 기억 될 것 같다.
그윽함, 고요함, 싱그러움은 곶자왈 숲길의 선물이다.
늦은 밤, 제주 공항을 떠나며 짧지만 깊게,
다정하게 손잡아 준 제주에게 고마웠다고 말을 전한다.
새삼스럽지만, 보석 같이 귀한 곳이 있음에 감사하다고 전한다.
내 영혼이 허허로와 질 때, 가슴이 메말라 쩍쩍 갈라지듯 삭막해질 때,
훌쩍 날아와 깊은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산호빛으로 때로는 진한 남색물빛으로 맞아 주던 바다가 있어,
풋풋한 생기로 내 몸의 세포들을 하나하나 갈아주던 숲속의 해맑은 기운이 있어,
태고의 소리로 하늘의 소리를 듣게 해주던 오름 능선의
거침없는 바람소리가 있어, 무척 행복했다고 가만히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