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복〈셉푸쿠〉切腹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 행위로 캅푸쿠(割腹), 토후쿠(屠腹), 하라키리(腹切り)라고도 불리며
에도 시대 이후 무사의 명예를 담보로 하는 형벌로 여겨졌다.
역사적으로는 『하리마 후도키(播磨風土記) 715』에서 여성인 오우미노 카미(淡海神)가 배를 가르고
못에 빠져 죽었다는 기술이 있는데 그것이 할복의 문헌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이어 988년에 후지와라노 야스스케(藤原保輔)가 생포되었을 때,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서
절명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1170년에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為朝),
1186년에 사토오 타다노부(佐藤忠信) 등의 할복이 궁키 모노가타리(軍記物語)에 기록되어 유포되었으며
이것이 점점 일반화되어 특히 무사들의 자살은 곧 할복으로 한정되었다.
카이샤쿠(介錯)라고 부르며 할복하는 사람 뒤에서 목을 치는 것은 1455년 치바 타네노부(千葉胤宣)가
피신해있던 타고성이 함락[타고 카이죠오(多胡開成)]되었을 때에 할복하며
엔죠오지 나오토키(圓城寺直時)에게 목을 치게 했는데 그 때부터 널리 유행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카이샤쿠가 주체가 되었으며 결국에는 참수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순사[준시(殉死)]로서 주군이 죽으면 따라서 할복하는 츠이후쿠(追復)는
1392년 호소카와 츠네히사(細川常久)가 병사할 때 할복한 미시마 게키(三嶋外記) 이후
1663년 토쿠가와 막부가 금지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1868년 코오베 사건으로 오카야마(岡山) 한시(藩士)였던 타키젠 자부로오(瀧善三郞)의 할복이
재일 외교관의 견문록에 의해 해외에 전해지면서 할복이 일본인의 하라키리(腹切り)로
해외에 알려지게 된다. 1873년 할복 폐지 이후에도 할복에 의한 자살은 남녀불문하고 끊이질 않았고
1970년에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할복은 세계적인 충격을 던졌다.
문예·회화·연극·영화 등에서도 할복을 많이 다루고 있다.
할복과 무사도
근세 이전의 할복의 사례를 보면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주로 적에게 포박되어 참수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자결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전쟁에 패했다 해서 즉시 자결하는 것이 아니고
지하에 잠입하여 재기를 노리는 무사도 상당히 많았다.
장렬한 할복에 대해서는 외경(畏敬)을 갖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할복 자체는
어디까지나 자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는 무사의 처형이 대부분 참수형이었고
신분 있는 무사라 해도 적에게 포박되면 참수형이든가, 감금당한 후에 적당한 방법으로
살해당하는 모살(謀殺)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할복에 대한 의식이 본격적으로 싹튼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센노 리큐우(千利休)에게 할복을 명령하고 나서부터이다.
할복이 습속으로 정착하게 된 이유로는 니토베 이나조오(新渡戸稲造)가 『무사도(武士道)』라는
책 속에서 〈복부에는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 신앙 하에
장렬하게 배를 가르는 것이 무사도를 관철시키는 자살방법으로서 적절하다〉고 지적한 것이
가장 설득력을 담보하고 있다.
할복의 종류로서는 주군을 따라 죽는 오이 바라(追腹, 츠이 후쿠라고도 함), 직무상 책임이나
의리를 관철시키기 위한 츠메 바라(詰腹), 원통함에 못 이겨 하는 무넴 바라(無念腹),
또한 패군의 장수가 적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피하기 위하여 하는 할복이나 농성군의 장수가
성안의 병사나 가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거래형태로 행하는 할복 등이 있었다.
사회가 안정된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동기의 순수함도 상실되고 가문의 존속이나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하여 행하는 할복이 아키나이 바라(商腹) 등으로
시니컬하게 불리자, 에도 막부는 즉각 순사(殉死)를 금지시켰다.
할복의 방법은 배를 한일(一)자로 가르는 일자형 할복[이치몬지 바라(一文字腹)],
일자형 할복을 한 다음에 다시 세로로 명치에서 배꼽까지 아래로 가르는
십자형 할복[쥬우몬지 바라(十文字腹)]이 있었다.
하긴 실제 체력적으로 십자형 할복까지는 고통이 너무 심하여
대개 도중에 목을 찔러 절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급기야는 고통의 시간을 최소화하고자 할복과 함께 목을 쳐서 떨어뜨리는
카이샤쿠(介錯)라는 방법이 확립되었다.
할복은 근세부터 자살 외의 처형 방법으로 채용되지만 이 경우,
자신의 죄를 스스로 처리하기 때문에 주군으로부터 〈죽음을 하사받는다〉는
생각에서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겨졌다.
이것에 대해서 참수[잔슈(斬首)], 하리츠케(磔, 기둥에 매달고
좌우에서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 등은 무사들에게는 불명예의 형벌로 여겨졌다.
처형 수단으로서 할복은 1873년에 폐지되고 이후 일본에서 사형은 교수형이 주로 이용되었다.
전국 시대나 에도 시대 초기에는 할복인이, 할복인의 목을 쳐주는 무사[카이샤쿠닝(介錯人)]나
검사(検死)역에게 목을 보여주는 등 할복의 보조를 행하는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배를 십자모양으로 가르거나 내장을 꺼내는 등의 과격한 방법(하지만
이것은 내장까지 도달하기 전에 실신하기 때문에 의학상으로는 불가능하다)도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궁키물(軍記物)에서 산견된다.
근세에 들어서 무사신분에 대한 처형으로 할복이 확립되자, 할복에도 메뉴얼이 등장한다.
할복하는 사람인 할복인[셉푸쿠닝(切腹人)]과 카이샤쿠닝(介錯人)에 의한 할복이 그것이다.
복부를 가르는 것만으로는 사망까지 시간이 걸리고 죽는 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보통은 할복을 시작하자마자 목 치기 무사가 목을 쳐준다.
에도 시대에는 할복은 복잡하고 세련된 의식으로 변하고 카이샤쿠가 동반하는 셉푸쿠의 메뉴얼이
18세기 초쯤 확립되었다.
카이샤쿠는 통상 정부(正副)의 3사람이 관여한다.
각각 목을 치는 〈오오가이샤쿠(大介錯)〉, 단도를 얹은 삼보오라는 상을 갖고 나오는
〈소에카이샤쿠(添介錯)〉, 목을 검사(検死)하는 〈코가이샤쿠(小介錯)〉 등의 3역이 바로 그들이다.
에도 시대 중기에는 셉푸쿠 자체도 형해화(形骸化)되어 삼보오의 상에 칼 대신 부채를 얹고
그 부채에 손을 대려는 순간에 카이샤쿠인이 목을 치는 방법인 센스 바라(扇子腹)가 일반적이었다.
어떤 무사는 〈나는 할복하는 법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라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막부 말기에는 전면적으로는 아니지만 본래의 할복이 부활했다는 기록도 있다.
할복의 장소는 다이묘오 급의 신분인 경우는 의뢰인의 저택 내부, 그보다 약간 신분이 낮은 경우는
의뢰인의 정원 앞, 더 신분이 낮은 경우는 감옥에서 행해졌다.
또한 아시가루 이하의 신분이나 서민에게는 할복이 허용되지 않았다.
할복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할복의 명령이 떨어지면 할복인에게 그 취지가 전달된다. 할복 전의 준비로 할복하는 사람은
목욕을 하고 몸을 정결히 한다. 이 때 사용하는 물은 세수대야 속에 찬물을 먼저 담고
거기에 더운 물로 조절하는 방식으로 보통 때와 반대이며 사체를 씻는 의식인 유캉(湯潅)과 같다.
이어 머리를 묶는데 보통 때 보다 높이 묶고 보통 때와 반대로 튼다.
복장은 시로무지의 코소데에 연노랑의 무늬가 없는 마(麻)로 만든 카미시모(裃)이며
코소데는 목을 쳐서 떨어뜨리기 쉽도록 뒤 깃을 이어붙인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체에게 입히는 것과 같이 왼쪽 깃을 앞으로 오도록 섶을 여몄다.
셉푸쿠의 장소는 거꾸로 뒤집은 두장의 타타미(흑색의 타타미에 흰 테를 두른 것)를 놓고
그 위에 연 노랑색 혹은 청색의 천을 깐 다음, 경우에 따라서는 흰 모래를 뿌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뒤쪽에는 거꾸로 병풍을 세운다.
할복하는 사람 앞에는 잔을 2개(위에는 초벌구이 잔, 아래는 칠기잔)와 더운 물에 말은 밥, 야채 소금절임,
소금, 된장, 거꾸로 놓은 젓가락이 곁들여진다.
이것이 할복하는 사람의 마지막 식사가 된다.
그리고 이어 검사(検死)역의 자리가 할복하는 사람의 맞은편에 설치된다.
목 치기 무사는 2~3명인 경우가 많다. 목 치기 무사는 단칼에 목을 쳐서 떨어뜨릴 만큼
검술에 뛰어난 자가 아니면 안 되었고 서툰 검객이 나섰다가 실수를 하면
몇 번이고 목을 쳐야 하는 참혹한 사태가 발생하기에 목 치기 무사는 의뢰인의 무사 중
가장 고수가 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카이샤쿠의 실패는 의뢰인 집안의 씻을 수 없는 수치가 되었다.
따라서 의뢰인 집안에 무술이 뛰어난 자가 없을 경우에는 다른 집에서 빌려오기도 했다.
할복하는 사람이 소정의 방법으로 4번의 술을 마시고 식판운반 담당자는
식판을 물리고 할복에 사용하는 단도를 상에 담아 가지고 온다. 이 때 할복인이 술을 더 달라고 해도
술에 취하면 법도에 어긋난다며 거절당한다. 할복에는 검은색 단검이 사용된다.
정(正) 목치기 무사는 할복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예를 표한다.
이어 그는 할복인의 뒤로 돌아가 목 치기용 칼을 물로 씻고는 목을 칠 자세를 취한다.
할복인은 검사역에게 예의를 표한다. 할복인이 배를 찌를 때 카이샤쿠인은 피부 한 꺼풀만 남기고
목을 치는 것이 예의로 여겨졌다.
목이 땅에 떨어져 땅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와 〈신체를 분할하는 것은 불효〉라는
유교 사상의 영향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토사(土佐)에서는 가죽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목을 절단하는 것을 원하는 경우도 있었고
할복인이 아예 목을 절단하는 것을 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목 치기가 끝나면 앞뒤 하얗게 바른 병풍을 둘러 사체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부(副) 목치기 무사가 목을 검사역에게 보이고 할복인의 절명을 확인하면 마침내 할복의식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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