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을 나누며

씨저 "브루투스 너마저도" 글쎄?

sunking 2014. 9. 17. 22:53

씨이저는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화유_在美作家

 

“다른 모든 정치형태를 제외하면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형태이다."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e others.

 

윈스턴 처칠의 명언이다. 절대군주가 대를 이어 다스리는 왕국이나 독재자들이 번갈아 가며

다스리는 전체주의보다는 민주주의가 낫지만, 민주주의도 가장 이상적인 제도는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요즘 한국 정치판 돌아가는 걸 보면,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적합한 제도인가 의심이 들 정도다.

국가원수를 보고 "씨X년"이라고 쌍욕을 해도 표현의 자유라며 오히려 영웅시하는 나라,

해난사고를 취임 15개월된 대통령 탓으로 돌리고 대통령까지 수사하겠다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를 보이콧하는 야당 때문에 몇 달 동안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않으면서도 세비와 추석 보너스는

열심히 챙겨가는 국회의원들, 17세 소녀의 몸으로 항일운동을 하다 옥사한 유관순이 빠진 책을

전국 고교생 절반 이상이 국사교과서로 쓰도록 검인정한 교육당국, 6.25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의 군인과 민간인을 죽게한 일급 전범 김일성을 애국항일투사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떳떳하게 교수 노릇하는 나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지나쳐 무정부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무질서하고 비생산적이어서 국민이 고달픈 민주주의보다는 질서 있고 생산적이어서 국민이 행복한

전체주의가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능한 민주주의적 지도자보다는 유능한 독재자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지중해 연안의 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지금의 중동지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던 로마의 통치자 줄리어스 씨이저 Julius Caesar·100~44 BC는 유능한 독재자였다.

그러나 그는 공화제와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일단의 의회의원들에 의해 대낮에 암살당한다.

암살자들은 씨이저가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공화제 수호를 위해 그를 살해했다고 변명했다.

과연 그럴까?

 

카이사르는 고민에 빠진다.. 소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상이 비참해지지만,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대낮에 브루투스에게 살해당했다는 씨이저가 암살당한 진짜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씨이저가 어떻게 2000년 전 세계 최강국 로마의 1인자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간단히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로마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대지주 그리고 고급 관료들로 구성된 상층계급과 그들의 노예들,

소규모 지주(주로 퇴역군인들)와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간 평민계급

그리고 토지가 없는 소작농민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그리고 군 지휘관들이 전공을 세우면 자연히 정치적 관료가 되었다.

씨이저는 고급관료를 많이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씨이저의 부모는 그리 부유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기원전 78년, 그러니까 씨이저가 20대 군 장교였을 무렵의 로마는 술라Sulla라는 장군이

최고 통치자로 4년간 지배하다 사망한 때였다.

그리고 씨이저는 술라의 정적인 마리우스Marius장군 편에 속했었기 때문에

술라 사망이후 득세한 폼페이우스라는 장군이 씨이저를 그의 수하로 데려다 쓴다.

폼페이우스는 크라쑤스라는 부유한 장군과 함께 로마를 지배했다.

폼페이우스는 당시 로마의 영토인 스페인 지역의 반란을 평정했고 크라쑤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노예반란을 평정한 공로자였다.

 

폼페이우스는 자기보다 일곱살 아래인 씨이저를 좋아해서 그의 친척되는 여자

폼페이아를 씨이저와 결혼시켰다. 씨이저는 병사한 그의 첫부인이 낳은 딸(줄리아)을

나중에 폼페이우스의 부인으로 보낸다. 그러니까 나이가 아래인 씨이저가 폼페이우스의 장인이 된 셈이다.

씨이저는 35세 때 로마 시내 공공건물, 체육과 오락시설 관리를 맡고 있다가

39세 때는 로마 식민지 스페인 군정관으로 파견된다.

그러나 1년만에 귀국하여 로마 최고행정관이 된다.

 

이를 계기로 씨이저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쑤스 등 세 장군의 삼두정권이 성립한다.

씨이저는 고올(지금의 프랑스와 독일) 담당 군정관이 되고 크라쑤스는 파르티아(지금의 이란과 파키스탄)를

담당하는 군정관이 되었다. 그리고 폼페이는 국내에 남았다.

 

얼마 후 크라쑤스가 전투에서 전사한 뒤에는 폼페이와 씨이저는 로마의 1인자 자리를 놓고

겨루는 라이벌이 된다. 씨이저는 폼페이우스의 친척인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부인으로 간 씨이저의 딸이 출산 중 사망하자 두 장군의 인척관계도 끊어졌다.

입법기관인 상원(원로원)은 폼페이우스보다 군인 및 평민들에게 인기가 좋은 씨이저를 더 경계했다.

 

씨이저는 해외 식민지를 지금의 영국까지 확장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상원은 그에게 직할군대를 해산하고

귀국하라고 지시한다. 씨이저는 폼페이우스도 자기 휘하 군대를 해산하면

자기도 그렇게 하고 귀국하겠다고 버텼다. 폼페이우스와 상원은 씨이저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저는 자기에게 충성스러운 군대를 해산하고 귀국하여 구속되느냐

반란을 일으키느냐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해 진격했다. 당시 로마법으로는 군대는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절대 국경을 넘어 국내로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씨이저는 군대를 이끌고 국경선인 루비콘 강을 건넌다.

이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틴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은 The die is cast!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래서 생사결단을 내리는 것을 지금도 "cross the Rubicon"(루비콘 강을 건너다)이라고 한다.

 

이로써 씨이저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내란이 시작된다. 씨이저 추종 군대는

스페인과 그리스 지역에서 폼페이 추종 군대를 패배시켰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배를 타고 도주한다. 씨이저는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갔다.

씨이저의 승리를 예견한 이집트 국왕과 그 신하들은 씨이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를 시체로 만난 씨이저는 한때 자신의 상관이자 동료였고

또 자기 딸의 남편이기도 했던 폼페이우스를 죽인 이집트 관리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씨이저는 곧 이집트 소년왕의 이복누이인 클레오파트라(당시 21세)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를 이집트 여왕으로 올려놓는다.

클레오파트라는 씨이저에게 아들을 하나 낳아주고 개선장군 씨이저를 따라 로마로 간다.

나중에 씨이저가 암살된 뒤 모녀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간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백인 후손인데, 그녀를 미인으로 기록한 사가(史家)도 있으나

미인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고만 쓴 사가가 더 많다.

 

씨이저의 파퓰리즘적 선정善政

로마로 돌아온 씨이저는 의회(원로원)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실상의 ‘왕’이 되어갔다.

그 권력을 가지고 그는 로마시민들을 위한 경제사회정책을 시행했다.

농토가 없는 8만여명의 로마 시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특히 3명 이상의 자녀를 둔 가구에는 모두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또 부자들이 거느리는 노예의 숫자를 제한해서 남는 일자리가

가난한 로마시민들에게 돌아가게 배려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하는 로마시민들에게만 식량 배급을 해주어 일하지 않는

건달들이 로마로 몰려들지 못하게 했다.

 

그는 로마의 인후라스트락쳐(사회기반시설)도 개량하고 증설했다.

이를테면 식용수를 공급하는 수로를 더 많이 만들고 또 하수도 시설도 만들어

평민들의 생활을 더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 로마시민들을 위해 체육과 오락시설을 많이 만들었다.

(암살 당한 후 공개된 씨이저의 유언장에는 자기 재산으로 로마시민들에게 1인당 75드라크마를

주라고 했고, 티베르 강 건너의 모든 씨이저 소유 땅은 로마 시민들을 위해 쓰라고 했다.

당시 1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씨이저는 또 로마군대가 점령한 식민지에서 대지주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로마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현지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함으로써 로마 군대가 식민지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아도 되게 했다.

그는 또 식민지 주민들에게 세금도 적정선에서 부과하도록 지시하여 식민지 주민들이

로마에 저항하지 않도록 했다.

그는 고올(현재의 프랑스와 독일을 합친 지역)과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 주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러한 대내외 정책 시행으로 씨이저의 인기는 폭등했다.

그의 정적들, 특히 기득권을 가진 대지주들은 평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씨이저가

자기들의 토지 소유권도 제한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들 대지주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원(원로원)의원 60여명이

그의 암살을 모의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씨이저는 이미 2000년 전 로마에서 파퓰리즘(populism) 정책을 쓰다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셈이다.

 

암살자들은 씨이저가 왕이 되는 것을 막고 공화제를 유지하기 위해

씨이저를 제거했다고 변명했지만, 그들이 진짜로 노린 것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 유지였다.

그 증거의 하나로, 암살 주모자들은 씨이저 암살 직후

로마의 해외 식민지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가지기로 결정한다.

 

브루투스 : 지중해의 크레타 섬

카씨우스 : 북아프리카(지금의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아 일대)

트레보니우스 : 아시아(지금의 터어키, 씨리아, 이스라엘, 이라크 등)

브루투스(암살 주모자와 동명이인) : 고올(지금의 프랑스, 독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대개 “민주주의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어쩌고저쩌고하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그들의 최우선 목적은 개인의 영달과 경제적 이익이다.

씨이저 독재 타도와 공화제 유지를 위해서 단행했다던 씨이저 암살은

공화제 유지는 커녕 공화제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가 된다.

 

기원전 44년 3월15일 아침, 56세의 씨이저 암살을 주도한 자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였다.

브루투스는 씨이저의 양자(養子)로 대개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양자가 아니고 씨이저가

스무살도 되기 전에 사랑한 여인이 나중에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라 한다.

브루투스는 씨이저의 라이벌 폼페이우스 수하여서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씨이저는 옛 애인의 아들인 그를 살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씨이저를 배반했다.

브루투스와 함께 씨이저 암살을 주도한 카시우스는 브루투스와 처남매부 사이였다.

 

씨이저의 진짜 양자는 씨이저 조카(여성)의 아들 옥타비우스(당시19세)였다.

그는 양아버지를 죽인 브루투스 일당과 싸운다.

이때 씨이저가 총애하던 부하 장군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우스와 한편이 되어 씨이저의 원수를 갚는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전투에서 참패하고 결국 자결하고 만다.

 

그 후 로마는 씨이저 양자 옥타비우스와 씨이저 부하 장군 안토니우스의 것이 되었으나

하늘에 태양이 하나 뿐이듯 로마의 지배자도 둘일 수는 없었다.

제1인자 자리를 두고 10년 이상 두 사람은 끝없는 군사적 대결을 벌이고

결국 씨이저 혈통을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옥타비우스가 승자가 된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간다.

그곳의 군주는 씨이저가 이집트 왕위에 올려놓은 애첩 클레오파트라다.

안토니우스는 씨이저의 애첩으로 로마에 온 클레오피트라를 보고 반한 바 있었는데,

씨이저가 암살된 후라 쉽게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도 씨이저보다 훨씬 젊은 안토니우스와 금방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옥타비우스가 이집트까지 추격해오자

안토니우스는 먼저 자결하고 이어 클레오파트라도 자살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8세. 이들 두 연인들의 이야기는

1963년 영화 "Cleopatra" (엘리자벳 테일러와 리차드 버어튼 주연)에 잘 그려져 있다.

 

동서로는 스페인에서 오늘의 이라크까지, 남북으로는 오늘의 프랑스와 독일에서

알제리아, 리비아와 이집트까지 걸친 지중해 주변의 광활한 땅을 지배하게 된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27년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변신한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우리의 고려왕조보다는 조금 더 길고,

조선왕조보다는 약간 짧은 기간인 476년간 존속된다.(

동로마제국까지 합치면 로마제국의 수명은 1453년이 된다.)

 

 

씨이저에 관한 여러 설의 허(虛)와 실(實)

씨이저가 브루투스의 칼에 맞을 때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탄식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쉐익스피어가 희곡을 쓸 때 극적 효과를 위해 지어낸 말이라는 게 정설이다.

씨이저 사후 150년 쯤 후에 씨이저 시대 인물열전을 쓴 플루타크Plutarch와

로마제국 황제열전을 쓴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씨이저 암살 전후 상황을

자세히 기록했지만 씨이저가 그런 말을 했다고 적지는 않았다.

 

씨이저가 암살된 장소는 상원(원로원)의사당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폼페이우스 기념관이었다.

그래서 스물 세 곳이나 상원의원들의 칼을 맞은 씨이저가 공교롭게도 그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 조각상 발밑에 쓰러지게 된 것이라 한다.

상원의사당은 그 전에 난 화재 때문에 보수 중이었다고 한다.

또 암살자들이 씨이저의 피에 손을 함께 담그고 거사 성공을 축하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쉐익스피어의 창작이라 한다. 암살자들이 한꺼번에 씨이저에 달려들어 경쟁적으로

칼질을 하는 바람에 자기들끼리도 가벼운 상처를 입혀

그들의 손에 모두 피가 묻었다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Caesar 이름이 나중에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 Kaiser(카이저)와

러시아의 Tsar(차아르)의 어원이라는 설은 맞다.

그러나 줄리어스 씨이저가 아니라 씨이저의 양자이자 로마제국 첫 황제인 Augustus Caesar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씨이저의 어머니가 배를 절개하여 씨이저를 낳았기 때문에 지금도

'제왕절개'를 caesarean section(씨이저리언 쎅션)이라 하고,

제왕절개 분만은 caesarean birth(씨이저리언 버엇스)라고 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그 옛날에 산모의 배를 갈라 분만을 할 정도면 산모는 이미 죽었거나

죽기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씨이저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씨이저를 낳았고

아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자르다” 또는 “가르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의 과거분사가 Caesar와 비슷해서

영어단어 caesarean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