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화

그리스-페르시아 전투2

sunking 2014. 7. 24. 13:25

 

아래의 글은 수출입 물류대행 회사를 운영하는 남도현님이 歷史와 戰史 부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증학적인 자료조사를 통해 관계자료를 모아 틈틈이

작성한 글입니다. 세계문화를 이해하는데(특히 부분) 많은 참조가 되어 포스팅합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투 2 _ august 의 軍史世界 중에서

 

 

침략자를 격퇴한 대승

 

이처럼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끈질긴 항전으로 기간이 길어지면서 당연히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 전투 같은 기념비적 전투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분수령이 된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역사적 의의가 크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그 잔영이 오늘날까지도 전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마라톤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역사의 현장이었던 마라톤

 

제1차 침공에서 그리스 정복에 실패한 다리우스 1세는 절치부심 끝에 기원전 490년 9월,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복수전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당시 선박의 운송 능력을 고려하고 전투 무대였던 마라톤 평원을

미루어 볼 때 결코 1만 5천명이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전성기의 아테네나 스파르타의 인구가 10여만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런 곳을 정복하려 수십만을 동원했다는 자체가 사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중무장한 페르시아군의 모습

 

원정군은 낙소스와 델로스를 차례로 손에 넣고, 에리트레아를 격파한 다음 아티카 반도에

상륙하여 아테네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아테네는

대처방법을 놓고 치열한 격론 끝에 마라톤에서 적을 맞아 싸우기를 주장한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제안을 채택하였습니다. 

방어전은 방어전인데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하는 것처럼 최대한 멀리서 적을 격퇴해 내는

공세적 방어의 개념이었습니다.

 

밀티아데스의 동상

 

아테네군은 밀티아데스의 지휘 아래 약 1만여 중장보병을 마라톤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매복하였습니다.  페르시아는 정면이 두터웠는데 그 이유는 우세한

기병을 중심으로 진을 형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항상 먼저 전쟁을 벌였을 만큼 페르시아군의 자신감이 여실히 드러난 형태였습니다. 

아테네군은 상대의 형태를 역으로 이용하여 양쪽 측면을 파고들었고

포위망 안에 페르시아군을 가두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아테네군(左)은 페르시아군의 측면을 파고들어갔습니다

 

페르시아군은 6,400명의 전사자를 내며 후퇴하였고 반면 아테네군은 단지 192명만

전사한 엄청난 대승이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우회하여 아테네를 직접 공략하려

하였지만 아테네군이 마라톤에서 아테네 인근으로 이동을 완료하자 공격을 포기하였고

이렇게 제2차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승리의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그 동안 그리스 국가들이 두려워만 하던 페르시아가 결코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사실깨닫게 해 준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가 결코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군보다 긴 창, 칼, 갑옷, 투구로 무장한 그리스의 중장보병이 우수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에 맞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하였거나 알아서 밑으로 들어갔던 수많은 폴리스들이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합종연횡하기 시작하였고 반면 이오니아 지역에 대한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서서히 감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의 중장보병(上)은 페르시아군(下)보다 전투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일부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습니다. 

마라톤 전투를 마치 명량해전처럼 절대 열세였던 아테네군이 거대한 페르시아군을

기적적으로 격퇴한 것처럼 묘사한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위에 설명한 것처럼 페르시아군이 우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압도적 우위를 점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지형이나 전투 여건은

홈코트의 그리스가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마라톤 전투는 그다지 커다란 싸움이 아닌데 그 과정의 고사가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역사적 의의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군사적 측면으로만 본다면 마라톤 전투는

지구상에 있었던 그저 그런 전투들 중 하나로 단정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규모도 크지 않았고 신출귀몰한 것으로 묘사된 작전도 감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가 아테네까지 단숨에 달려가 노심초사하던 시민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한 후 사망했다는 고사는 마라톤 전투를 하나의 전설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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