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에세이

우리나라 인터넷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sunking 2014. 5. 5. 22:39

 

인터넷과 카톡이 불통되니 갑자기 멘붕상태 돌입

 

 

     우리나라 인터넷을 최초로 개발한 전길남박사(좌)와 그의 제자들이 모여 개발  당시를 회고하며 자축연(우)을 개최하고 있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은 휴무. 금요일 잠간 일하고 토요일을 시작으로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낀

4일 동안 황금 연휴가 시작되었다. 공항은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나간다고 북새통이고

고속도로에는 나들이객으로 차량들이 장사진을 치고 웅크리고 있다.

그렇치만 글쓴이는 이때쯤이면 먼 곳을 떠나지를 못한다. 부친 기일이 사월 초파일이라

산소에도 가야하고 병점에 계신 큰 형님댁에 가서 기제사도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쉬는 동안 그동안 미루어 온 디자인 작업도 하고 글도 쓸 요량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구동되지를 않는다.

아파트 내에 인입된 단자에 문제가 있는지 이러저리 살펴봐도 보통 때와 마찬가지인데 안되니

어떻게 할 재간이 없다. 아래층에 살고 있는 딸아이 집도 인터넷이 먹통이라고 하니 

컴퓨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는 정도로 갈증은 풀었지만 근본적인 작업을 못해 매우 답답하던 차에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SNS의 총아라고 하는 카톡의 앱이 날아가 버렸다.

그깟 앱을 설치하는 일이야 스마트폰 초보자도 쉽게할 수 있는 일이니 다시 깔면 되지 싶어 부팅을 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어떠한 방법을 강구해도 설치가 되지를 않는다.

 

인터넷도 안되고 카톡도 안되니 갑자기 멘붕상태.

아무일도 못할 정도로 안절부절 상태가 된 것이다.

그동안 내 생활에서 인터넷과 카톡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이렇게 클 것이라고 미처 생각 못했다.

인터넷과 카톡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의 삶 속에서 물과 공기의 비중만큼 상당한 위치에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다.

 

여하튼 이런 저런 사연을 거쳐 인터넷도 복구되고 카톡도 원활하게 소통되니 비로서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 참 무섭기 무섭다.

언제부터 인터넷과 카톡을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이틀동안의 불통에 이렇게 안절부절하다니.

 

갑자기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인터넷강국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알기로는 김대중정부 때 벤처기업을 육성하고 정부에서 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개발되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인터넷을 통해 조선일보 이태경 기자와 엄보운 기자가 인터넷 개발자 전길남 박사를 만나

인터뷰한 기사를 참고로 우리나라 인터넷 역사를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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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한 연구실.

재일교포 출신의 한 과학자가 침을 '꿀꺽' 삼키고 컴퓨터 앞에 섰다.

연구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서울에 있는 컴퓨터에 원격 로그인을 시도하려던 참이었다.

간헐적으로 컴퓨터에서 "삐익 삐이익" 날카로운 기계음이 흘러나오길 여러 번.

'$ rlogin snucom' 구미 연구소 컴퓨터 모니터에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컴퓨터로

원격 접속됐음을 알리는 문구가 떴다.

독자 기술로 <정보통신 강국> 한국의 초석을 놓는 순간이었다.

 

지켜보던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컴퓨터 앞에 서 있던 과학자는 감격에 겨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국 인터넷 역사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세계에서 인터넷을 가장 먼저 개발한 나라는 미국이다.

1969년 미국은 UCLA와 스탠퍼드대학 등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는 어느 나라일까. 놀랍게도 한국이다.

전길남(71)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그 주인공이었다.

한국 인터넷의 역사가 시작된 그날 이후 전길남은 대한민국 인터넷의 대부代父라 불린다.

 

전 박사는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 인터넷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애썼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터넷 국제표준을 정하는 국제인터넷협회가 선정하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올라있다.

 

전길남 박사는 해외 과학자를 유치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야 말로 선진강국으로 가는 길임을

내세운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력으로 1979년 귀국했다.

그는 귀국할 때 "한국형 알파넷(인터넷의 전신)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그에게 준 임무는 국산 컴퓨터 개발.

그는 컴퓨터를 만드는 것보다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정부를 설득해보려 했다. 한국이 뒤늦게 컴퓨터 제조업에 뛰어들 바에야

인터넷 기술을 선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물 같고 공기 같은 존재지만 당시 한국에는 인터넷의 효시가 된

컴퓨터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진 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원하는 대로 컴퓨터 개발 작업을 하면서 인터넷 개발도

슬쩍 끼워넣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청와대에 가서 인터넷을 개발해야 한다고 우겼던 나도

지금처럼 인터넷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고...

 

올해로 한국에서 인터넷이 개통된 지 32년.

지난 30여년 한국 인터넷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무섭게 성장했다.

이 인터넷 발전의 뒤엔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대통령과 전길남 박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에 이어 한국에서 인터넷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인터넷 기구를 설립해 인터넷 표준을 제정했고 카이스트에서 26년간 교수로 일하면서

IT업계 인재들을 키워냈다.

NXC(게임회사 넥슨의 지주회사)의 김정주 회장,

리니지를 만든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 정철 전 삼보컴퓨터 사장,

허진호 전 아이네트 사장이 모두 그의 제자이다.

<전길남 사단>이라 불리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전길남 박사가 없었으면

오늘 우리나라의 인터넷 발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길남 박사는 일본에서 태어나 오사카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곳에서 인터넷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과학자 빈튼 서프와 함께 통신 기술을 연구했고

1979년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일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재일교포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중 하나는 아버지가 경남 거창 출신이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 과학자 귀국 정책을 적극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렇치만 NASA에 근무하는 엘리트가 정치사정이 불안한 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두

미친 일이라고 주위의 만류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조국을 위해 기여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NASA는 인류 최고의 기술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위대한 조직이다.

내가 없어도 그 조직은 문제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한국은 달랐다.

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이제 배울 만큼 배웠으니 내가 아는 걸 조국을 위해 쓸 때라고 생각했다."

 

조건도 상당히 좋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지 몇년 안 된 사람을 대통령 월급보다 많이 주고

운전기사 딸린 자동차에 집까지 주면서 KIST에서 독립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시스템개발실장이란 직책도 주었다.

 

정부는 컬러TV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자신을 가지고 있던 시기라 국산 컴퓨터를 개발해

수출하기 위해 그를 부른 것이었다.그렇치만 전 박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컴퓨터 국산화를 하면 세계에서 20번째였지만 인터넷을 개발하면 세계에서 최초 아니면

두 번째가 되는 것이고 한국의 미래는 인터넷이 좌우할 것이라고 미래를 내나본 것이었다.

 

전 박사는 UCLA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NASA에서도 우주비행선과의 컴퓨터 통신 기술을 연구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충만했다.

 

특히 국가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박정희 대통령도 연구소로

한달에 한번씩 직접 찾아와 '우리나라, 이거 안 되면 큰일 난다'고 독려했으니.

국가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고 생각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었던 것이다.

 

1980년 3월 24일 카이스트 전길남 교수 연구실에서 하와이 대학으로 보낸 이메일이

우리나라에서 국외로 보낸 최초의 이메일이다.

MIT 애들도 낑낑대는 걸 전길남 박사팀이 해낸 것이다.

 

인터넷 개발 초창기엔 그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전 박사가 해외 학회에 나가 MIT, UCLA, 스탠퍼드대학 학자들 앞에서 당대 최신의 연구 논문이

'인터넷에 올려 두어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있으니 가져가라'고 하면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저 있다.

인터넷이 연결되자 귀한 선진 정보가 대한민국에 실시간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인터넷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한국경제도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된 것이다.

실로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만큼 큰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을

전길남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1979년 10월 26일 작고)이 해낸 것이다.

 

이번 연휴동안 인터넷과 카톡이 안되는 홍역을 치루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력과 조국을 위해 헌신한 전길남 박사가 있었음을 알게되어 무엇보다 보람찬 연휴였음을 밝혀둔다.

 

-죽로산방에서 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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