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그녀의 신분은 기녀이다. 조선사회는 남성들에게 여성편력에 관한 한 관대했다.
하지만 규방의 여성들은 남성과의 접촉에서 제한적이었다. 관대함과 제한성이라는 상충된 환경에서
이 둘을 연결시킨 것이 ‘기녀’였다. 기녀는 조선사회에서 남성과 공식적으로 관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기녀 출신인 황진이는 규방 출신의 감동이나 어우동과 달리 음란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시와 음악은 기녀라면 갖추어야 할 재능이었고, 아름다운 외모에 재능까지 갖춘 황진이는
남성들의 권력을 무너뜨리지 않는 기녀였다.
양반의 얼녀였던 황진이는 16세기 조선사회의 규범에 따라 양반의 첩이 될 운명이었다.
첩이라는 것이 정실 부인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것이지만, 사대부의 첩이라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처럼 자식도 서출이라는 신분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황진이는 신분상의 운명을 택하지 않고 자유를 택했다.
물론 기녀로 산다는 것 또한 신분상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기녀와는 달랐다.
당시 기녀들의 소망이었던 사대부 첩 자리를 박차고 기녀라는 천한 신분을 택했고 이를 통해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양반도 상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이러한 황진이의 자유로움과 급진적인 성향은 남·북한 모든 소설가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덕목이었다.
황진이는 학식과 권세를 겸비한 조선사대부들을 희롱하고자 조선 최고의 군자라고 불린 벽계수(본명 충남)를 유혹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황진이의 격조있는 구애시 앞에 벽계수는 군자로서의 허울을 벗어 던졌다. 종친이라는 신분과 당대 최고의 호인인
벽계수를 무너뜨린 일로 황진이는 유명세를 탔다. 벽계수에 이어 불가의 생불로 통하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고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황진이의 일생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일 것이다. 황진이는 당시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 선생이
진실한 군자인지 거짓 군자인지 밝혀보고자 했다. 모든 남성이 황진이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화담선생만큼은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다. 화담선생의 높은 덕망 앞에 황진이는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자신과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라 칭송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