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에서 적자가 된 봉래 양사언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위의 시조時調는 우리들이 잘아는 봉래蓬萊 양사언(1517~1584)의 시조이다.
양사언은 조선조 중기 한석봉에 버금가는 명필가이자, 여덟고을을 선정으로 다스린 선비로 유명하다.
그는 너무 자연을 좋아하고 즐겨, 호를 금강산의 별칭인 봉래蓬萊라 할 정도로 금강산을 사랑했고,
강릉부사를 비롯, 강원도 지방관을 자청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안빈낙도安貧樂道한 선비이다.
하지만 그는 본래 그의 모친이 촌가 출신으로, 정상적으로는 양반이 될 수 없었고,
또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는 신분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13세 때, 혼자 집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길손이
"말이 지쳐서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으니, 좀 쉬어가게 해달라!"고 하니,
이 소녀는 "제가 말죽을 쑤어 드리지요!"
하고는 돗자리를 들고나와 그 길손도 나무 밑에서 쉬게 하고,
말죽뿐 아니라 그 길손에게 밥 한상까지 잘 차려서 대접하면서
"말이 이렇게 지쳤는데, 손님께선 얼마나 더 시장하시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길손은 이 소녀가 아무리 보아도 영리하고 대답하는 품도 나직하고 다소곳하면서 조리정연한 말솜씨인지라,
자신이 고을의 사또임을 밝히면서 애지중지하던 부채를 '채단처럼 생각하라!'며 선물로 주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소녀가 사또의 후실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사또의 정실이 세상을 떠나자, 후실이 된 이 소녀는 정실처럼 들어앉아 큰 살림을 도맡게 되면서
두사람 사이에 태어난 사언, 사기 형제와 전처 소생인 사준 등 삼형제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 주위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후 사또가 죽자, 집안은 장래문제로 분주하게 되었는데 이 어미는 평생 소원이 사언, 사기 형제의 머리 위에
씌어진 '서자'의 너울을 벗기는게 가장 큰 소망이라, 적실인 사준에게
"첩이 양씨 가문에 들어와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나라 풍습이 적서를 심하게 갈라놓고 있어, 슬프기만 합니다.
아들이 재주 있고 풍채 또한 빼어나도 서자의 너울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첩이 또한 이 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진 채 흙을 쓰고 죽는 날에도 아드님(사준)께서는
석달 복 밖에 입지 않을 터이니, 이리되면 그 때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소리를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하니 내가 지금 영감님의 성복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동되어 남들이 모를터이니,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하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들고 품에서 장도리를 꺼내어 땅바닥에 꼬꾸라지니,
세 아들이 달려들어 일으켜 세웠을 때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여 봉래 양사언은 서자에서 적자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는데 우리 역사에서 서출이 양사언처럼
적출로 된 예는 아주 드문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미들의 자식사랑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가 보다.
인터넷에서 글을 읽고 윤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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