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화

중국에 대해서

sunking 2013. 11. 16. 23:49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는 단일민족, 단일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주변국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상호왕래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통용되는 역사 시기 구분은 마르크스 유물주의 사관에 근거하여

크게 고대, 근대, 현대, 당대(當代)로 나누고 있으나,

최근 중국 국무원 자료에서는 중국 역사를 고대, 근대, 현대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고대는 하-상(은)-주-진-한-위진남북조-수-당-송-원-명-청 아편전쟁(1840) 이전까지이다.

근대는 아편전쟁부터 5·4 운동(1919) 이전까지의 구민주주의 혁명시기와 5·4운동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 이전까지의 신민주주의 혁명시기로 나눌 수 있다.

현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말한다.

이러한 구분 가운데 본 장에서는 하나라부터 근대 신해혁명(1911)까지의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하(夏)나라
신석기 말기에는 황허(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많은 부락이 분포했고,

그 중 황제(黃帝)의 후예인 하후씨(夏後氏)를 창시자로 보는 하(夏) 부족은 황허 중류에 위치하였다.

이후 하 부족은 주위에 있는 여러 부족을 융합해 부락(씨족)연맹체가 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연맹체는 민주적 방법으로 군주를 추천하고 선발하는 선양제(禪讓制)를 시행하여,

요(堯) 임금, 순(舜) 임금, 우(禹) 임금이라는 걸출한 부락연맹의 수령이 차례로 등장했다.

당시 황허의 잦은 범람으로 사람들이 큰 재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요 임금은 곤(鯀)에게 홍수를 다스리도록 명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부락연맹의 수령 자리를 이어받은 순 임금은 곤의 아들 우에게 홍수를 다스리게 했다.

그는 곤이 했던 둑을 쌓아 물을 막는 방법과는 달리, 작은 물줄기는 큰 물줄기로 흐르게 하고

큰 물줄기는 바다로 향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여 홍수로 인한 재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치수(治水) 사업의 공으로 우는 순 임금의 후계자가 되어 부락연맹의 수령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치수를 기반으로 한 농업생산 발전과 부족 간의 전쟁을 통해 하 부족은 중원 지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에 기원전 2070년경에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가 출현하게 된다.

 

우 임금은 선양제를 통한 왕위 계승의 전통을 계승하여 동이(東夷) 부락의 수령인 익(益)을 후계자로 세웠으나,

우 임금의 아들인 계(啓)가 익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원래 있던 '선양제'가 폐지되고 왕위세습제가 확립되었다.

이는 씨족공유제의 원시사회가 붕괴하고 사유제의 계급사회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천하를 만인의 것으로 여기는 '대동(大同)시대'에서 천하를 특정 집안의 것으로 여기는

'소강(小康)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토지국유제를 실행한 하나라는 농업에 필요한 역법을 만들어 사용했고,

아울러 청동 주조기술을 발명하여 수공업의 발전을 가져와 사회생산력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러한 청동기의 출현은 바로 원시 시기인 석기시대가 끝나고 문명 시기인 청동기시대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이후 하나라는 계 임금의 아들인 태강(太康)이 즉위하였으나 수렵만 일삼고정사를 게을리하여 동이 부락의 수령인

예(羿)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는데, 역사서에서는 이를 '태강이 나라를 잃어버림(太康失國)'으로 기록했다.

이후 태강의 동생인 중강(中康)의 아들 소강이 다시 회복시켰는데, 이를 '소강이 중흥시킴(小康中興)'이라 하였다.

하나라는 걸(杰)왕의 폭정으로 멸망했다. 폭군이었던 그는 무력으로 백성을 괴롭히고 사치를 일삼아 백성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때 상(商) 부락이 강대해지기 시작했고, 그 수령인 탕(湯)이 군사를 일으켜 하를 공격하여 걸왕을 무너뜨리고 상나라를 세웠다.

2. 상商(은殷)나라
동이의 한 갈래인 상 부족은 황허 하류 지역에 거주했다. 같은 시기에 등장한 상나라와 하나라는 모두 황제를 뿌리로 했던

두 집단이었지만, 상나라는 줄곧 하나라의 신하로 있었다. 이는 상 부족의 시조인 설(契)이 우 임금을 따라 치수에 종사했고,

우 임금은 그를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상 지역에 봉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설왕에서 탕왕까지는 하나라 시대에 해당한다.

탕은 걸왕이 민심을 잃은 것을 틈타 하의 속국들을 일소하고 세력을 확대하여 상나라를 세웠다.

상나라 초기에는 왕실 내부의 왕위쟁탈이 끊임없이 일어나 통치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에 도읍을 여러 차례 옮기다가, 19대왕인 반경(盤庚)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도읍을

은[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샤오둔(小屯)]으로 천도하였는데, 도읍이 된 은은 번화한 대도시로 발전하였고

상나라도 전례 없는 부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상을 은이라고도 한다.

특히 무정(武丁)이 통치했던 50여 년은 상나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였다.

상나라는 기본적으로 대가족 제도와 종법 관념을 갖추고 있었고, 제사나 정벌 등 국가대사에 있어서는

반드시 갑골 복사(甲骨卜辭)1)로 점을 쳐 결정했다. 매번 점을 칠 때마다 점복(占卜) 날짜와 길흉(吉凶)의 결과 등을

거북이 등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새겨두었는데, 이러한 갑골 복사는 중국 문자의 출발점이자 원시 형태의 문헌자료이기도 하다.

국가조직에 있어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임금은 절대적 권력을 지녔으며, 아래로 임금을 도와 나라를 통치했던

상(相, 몽재(冡宰)라고도 함)과 농업 생산이나 수공업 생산 그리고 점복이나 기사(記事)를 관장했던 관리가 있었다.

또한 상나라 때는 청동 제조기술이 더욱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정교한 무기와 용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형법에 따라 백성을 통치했다.

상나라 후기에 이르러 귀족들의 생활은 부패와 사치에 물들었고, 제도적 악습의 폐해도 심각하게 드러났다.

당시 왕이 신령에게 제사를 올릴 때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쳤는데, 그 수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울러 무관촌(武官村)의 큰 무덤에서는 왕족의 죽음과 함께 산 채로 순장된 많은 유골이 나왔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상나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는 성품이 포악한 인물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이에 발(發, 이후 주나라 무왕(武王)이 됨)이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목야(牧野)에서 주왕과 결전을 치렀다.

주의 폭정을 원망하던 상나라 군대는 연합 제후국들과 싸우는 대신 오히려 상의 수도를 공격하는데 동참하였고,

이로써 상나라가 막을 내리고 주나라가 시작되었다.

3. 주(周)나라
주나라의 시조인 기(棄)는 하나라 때 농업을 관장하는 관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데, 이후 그는 농업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농업의 신인 후직(后稷)으로 추존되었다. 그의 4대손인 공류(公劉) 때 빈(豳)으로 도읍을 옮겨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유목부락인 융(戎)과 적(狄)의 침입을 누차 받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그의 9대손인 고공단보(古公亶父)는 부락민을 이끌고

기산(岐山)의 남쪽 주원[周原,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치산(岐山)]으로 이주하였다.

주원 일대는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한 곳이었기에 고공단보는 이곳에 초기 국가조직인 도성을 쌓아 도읍을 정하고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그를 '태왕(太王)'이라 칭하며 주나라의 건국자로 여겼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주 민족은 여전히 상의 속국이었지만,

고공단보의 아들인 계력(季歷)과 손자인 창(昌, 이후 주나라 문왕(文王)이 됨)에 이르러 국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특히 문왕인 창은 내적으로는 국가조직을 정비하고 외적으로는 주변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위수(渭水) 중류 지역의 통치를

공고히 하였다. 아울러 그는 상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숭(崇) 부족을 멸망시키고 도읍을 숭 부족의 옛 땅인

풍읍(豊邑, 지금의 산시성 시안(西安)의 서쪽)으로 옮겼고, 그 후부터 주 민족은 상나라를 위협할 만큼 강성해졌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다시 도읍을 호경(鎬京, 지금의 시안)으로 옮겼다.

이 시기 상나라는 동이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계급투쟁이 첨예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무왕은 주위 여러 부족과 연합하여 목야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 이로부터 서주 시기가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우선적으로 왕조의 정당성을 '천명(天命)'이론으로 확보하려 했다.

귀신을 신봉했던 상나라는 천명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주나라는 천명이란 최고의 도덕적 역량을 갖춘

집안에만 수여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이는 상나라 왕이 이미 하늘로부터 그 덕을 잃었기에, 상나라 사람들이 숭상했던

상제(上帝)가 주나라에게 천명을 수여하여 통치를 인가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몰락한 상나라 귀족과 주위 연맹국들에 대해 기미(羈縻)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정책으로 걸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은(殷)의 제후로 봉하여 상나라의 유민들을 통치하게 한 것이다.

아울러 무왕은 상나라의 왕기(王畿)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무왕의 동생인 삼숙(三叔, 관숙선(管叔鮮), 채숙도(蔡叔度),

곽숙처[霍叔處)]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고, 이들 삼숙의 임무는 바로 무경과 상나라 유민들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무경은 표면적으로 주나라에 복종하였으나 속으로는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무왕이 죽은 후 어린 성왕(成王)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이 그를 보좌하여 국정을 돌보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삼숙과 무경이 연합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정벌하여

이들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후 주공은 무경 등이 일으킨 반란을 거울삼아 동쪽에 낙읍[洛邑, 지금의 뤄양(洛陽)]을 세워

상나라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로써 주나라는 서쪽의 호경과 동쪽의 낙읍이라는 두개의 도성을 가지게 되었다.

주공의 치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례를 제정한 것과 음악을 만든 것이다.

공자(孔子)2)가 추종했던 주나라의 예(禮)는 등급사회의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새로운 윤리규범 체계로,

귀천(貴賤), 존비(尊卑), 장유(長幼), 친소(親疏) 등의 차별을 통해 사회등급의 집단적인 행위규범을 정한 것이다.

이러한 의례와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 음악이다.

차별을 중시하는 의례와는 달리 조화를 중시하는 음악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자극하여 동질감을 형성함으로써

사회의 단합을 유지하게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였다.

주나라 정치제도의 기본형식은 바로 분봉제의 시행이었다. 정복 지역에 대한 안정을 위해 시행한 이 제도는 적자 계승을 기본으로 하는 권력분배제도인 종법(宗法)제도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무왕 때부터 시작된 이 분봉제는 주공에 의해 확대되어 당시 71국을 분봉하였다. 그 중 다수는 희(姬)씨 성의 주 왕실 지배계급 자손들이었고, 소수만이 이성(異性) 제후였다. 주나라 왕이 제후에게 이러한 분봉제를 시행하면서 성대한 책명(策命) 의례를 베푼 것은 계약 성격을 지닌 권위의 위탁이었다. 이는 바로 왕과 제후 사이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제도였다. 그래서 주나라 왕은 왕기(王畿) 이내 땅인 호경과 군사적 거점지역인 낙읍의 일부 지역을 직접 다스리고, 그 외 지역은 제후국으로 봉하여 땅과 토지를 부여했다. 주요 봉후국으로 위(衛), 노(魯), 제(齊), 송(宋), 진(晉), 연(燕)나라가 있었다.

주나라는 토지의 국유제를 실시하여 통치권 내에 있는 토지와 백성은 모두 주왕에 귀속되었다. 주나라 왕은 토지와 농노(農奴)를 제후들에게 분봉하였고, 제후들은 이를 다시 경대부(卿大夫) 등에게 분배하였다. 이러한 토지 소유제가 바로 '정전(井田)제도'이다. 주나라는 성왕에서 공왕(共王)까지 태평성대를 구가하다가 이후 점차 쇠락하였다.

이후 평민들의 폭동으로 여왕(厲王)이 물러나고 제후들이 공동으로 정치한 것을 '공화행정(共和行政)'이라 한다. 선왕(宣王) 때 잠시 중흥을 이루었지만, 제12대 유왕(幽王)에 이르자 주나라는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뒤를 이은 평왕(平王)은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하였지만(기원전 770), 제후들을 통솔하는 왕으로서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이로부터 동주(東周) 시기로 접어든다.

춘추시대
동주 시기에 이르러 주 천자는 천하 공주(共主)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과거 봉건 종속관계로 형성된 제후국과의 통일 유대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다만, 당시 140여 개나 되는 제후국들은 주 왕실을 상징적 종주로만 인정하면서 예(禮)적 질서를 지킬 뿐이었다. 이 시기를 춘추(春秋)시대라 한다. 제후국들이 강성해지고 북쪽의 융적(戎狄) 세력과 남방의 초(楚)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주 천자를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천하 일을 간섭하고 처리했던 세력 강한 제후국들이 있었으니, 바로 춘추오패(春秋五覇)3)이다.

전국시대
'전국(戰國)'이라는 명칭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했다. 이 시기에 각 제후국 간의 전쟁과 겸병으로 혼란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전국시대'라 부르게 되었다.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일곱 제후국만 남게 되었고, 이들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바로 위(魏), 한(韓), 조(趙), 진(秦), 초(楚), 연(燕), 제(齊)나라이다.

전국 초기에는 한, 조, 위 세 나라가 동맹을 맺어 다른 제후국보다 강했으나, 이후 동맹이 깨지면서 제나라와 진나라가 강성해졌다. 이에 소진(蘇秦)은 6국이 종적으로 연합하여 진의 강성에 대항할 것(합종合縱)을 주장했고, 장의(張儀)는 진과 6국이 개별적으로 횡적 동맹을 맺을 것(연횡連橫)을 주장했다. 이러한 합종연횡의 결과로 말미암아 전국 후기에는 진나라의 세력이 더욱 강했다. 특히 상앙(商鞅)의 변법4)은 진나라를 부강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진나라의 강성은 나머지 6국의 소멸과 동시에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게 하였다.

4. 진(秦)나라
전국칠웅 가운데 진나라는 6국을 차례로 정복하여 기원전 221년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를 건립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은 당시 군주의 지위인 왕의 명칭을 전설상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과 '제'를 차용해 '황제(皇帝)'라 정하였고, 이로부터 이 명칭은 청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관리체계인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또 각 군은 몇 개의 현(縣)을 관할하게 했고, 이들의 수장인 군수(郡守)나 현령(縣令) 등은 모두 황제가 임명하였다. 아울러 이들의 부임지를 수시로 옮겨 한 곳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진나라는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통치기구로 삼공구경제(三公九卿制)를 실시하였다. '삼공'에는 황제를 보위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승상(丞相)', 군정을 담당하는 '태위(太衛)', 승상을 보좌하며 관리 감찰을 주관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가 있다. '구경'에는 종묘제사와 의례를 담당하는 '봉상(奉常)', 황제의 시종인 '낭중령(郎中令)', 궁중경비 담당의 '위위(衛尉)', 형법 담당의 '정위(廷尉)', 궁중의 거마(車馬) 담당의 '태복(太僕)', 외교와 민간사무 담당의 '전객(典客)', 재무 담당의 '치속내사(治粟內史)', 황실 사무 담당의 '종정(宗正)', 황실재정과 관영수공업 담당의 '소부(少府)'가 있다. 이처럼 삼공구경이 맡은 일은 최종적으로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황제제, 군현제, 삼공구경제는 거의 완전한 정치제도로 중국 고대 정치제도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왕조를 탄탄하게 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2,000여 년의 봉건왕조 역시 기본적으로 이 제도를 답습하였다.

진시황은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문자를 소전(小篆)으로 통일시켰고,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여 통일 국가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는 또 이사의 건의로 법가(法家)를 추존하여, 새로운 법령과 제도에 반대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460여 명을 함양성(咸陽省) 밖의 구덩이에 파묻어버리고 유가 경전인 시(詩), 서(書) 등을 소각시킨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채택한 이러한 법가의 법치주의는 진나라의 통치기반을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진나라를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아울러 대규모의 토목사업과 정벌 등으로 농민들은 가혹한 부역과 무거운 세금을 지출해야만 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주동한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진나라에게 정복당한 6국의 구 귀족들이 전국적으로 반진(反秦)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진나라는 14년 만에 막을 내렸다.

5. 한(漢)나라
진광과 오승의 봉기에 이어 나타난 반진(反秦) 운동에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유방(劉邦, 기원전 256~기원전 195)과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였다. 유방와 항우는 먼저 홍구(鴻溝)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한(漢)이 동쪽은 초(楚)가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후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중국을 재통일하고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을 수도로 삼은 한 제국을 건설했다.

한나라는 고조(高祖) 유방에서 14대 왕망(王莽, 기원전 45~서기 23)이 정권을 찬탈하기까지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이라 하고, 왕망이 효수(梟首)된 후 유수劉秀(광무제光武帝, 기원전 6~서기 57)가 뤄양(洛陽)에 도읍을 정한 이후를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 한다. 한 고조인 유방은 진나라의 삼공구경제와 중앙집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만 진나라의 군현제에 있어서는 군현제와 분봉제를 절충한 군국제를 시행하였는데, 이는 이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한 고조를 이은 문제(文帝, 기원전 202~기원전 157)와 경제(景帝, 기원전 188~기원전 141)는 피폐한 사회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주력하였기에, 이것을 역사적으로 '문경지치(文景之治)'라 일컫는다. 이들은 진나라가 형법만을 사용하여 그토록 빨리 멸망했다는 역사적 교훈에 따라 무위(無爲)의 정치사상인 황로사상을 받아들여, 정치적으로 법망을 느슨하게 하고 형벌을 줄이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부역을 가볍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렇듯 한나라 초기에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킴으로써 국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한나라의 통합과 팽창에 중요한 사안은 바로 지방할거세력의 제거에 있었다. 중앙과 지방할거세력과의 모순은 주로 제후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지에 대한 삭감정책에 기인하였다. 경제 시기에는 제후들이 분봉 받았던 토지가 너무 많아 중앙 직속의 지역보다 훨씬 넓었고, 소금·전매, 부세징수, 관리 임면 등을 독자적으로 자행하여 그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는 추세였다.

이에 조조(晁錯)는 경제에게 영지 삭감 정책인 '삭번책(削藩策)'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제후들이 '오초칠국'의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평정한 경제는 행정권과 관리임명권 등을 중앙에 귀속시켰고, 제후들의 봉토 또한 중앙이 직접 관할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 무제(武帝)는 경제의 삭번책을 더욱 강화시켜, 제후들은 조세만 거둘 뿐 정치에 관여할 수 없게하는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한나라 초기에 실시했던 군국제의 폐해는 사라지게 되었고, 중앙집권화가 확립되었다.

한 무제는 추은령 외에도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자사(刺史)' 제도를 두었다. 이는 중앙에서 자사를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시하고 황제권을 관철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승상의 직권을 축소하고 태위의 직권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태위를 대사마대장군으로 칭하면서 승상의 군사권을 분담시켰다. 그리고 소금과 철의 전매를 중앙이 독점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아울러 한 무제는 한 초기의 '황노무위(黃老無爲)' 사상에서 벗어나 동중서(董仲舒)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러나 황제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비록 유교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기에 법가 사상을 가미한 '내법외유(內法外儒)' 방식을 표방하게 된다. 한 무제는 또한 승상을 중심으로 한 '외조(外朝)'는 단순히 일반 정무만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기구인 '내조(內朝)'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조의 우위는 외척의 세력을 키우게 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망이 정권을 찬탈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애제(哀帝)가 붕어하자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한 왕망은 중산왕 간(衎)을 평제(平帝)로 옹립하고 대사마가 되었다. 대사마가 된 그는 나라를 찬탈하여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왕망의 개혁정책은 지방 토착세력인 호족(豪族)과 농민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에 광무제가 이를 평정하고 나서 한 제국을 재건하게 된다.

광무제는 왕망이 시행했던 정책을 간소화하였고 행정기구와 관리를 축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선발 제도를 건전하게 하여 통치에 힘썼다. 아울러 그는 한 무제가 시행했던 중앙집권체제 정책을 더욱 계승 발전시켜 나아갔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앙권력이 약화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외척의 전횡, 환관의 권력 찬탈, 수많은 당파 싸움 등에 기인하였다. 이에 통치자 집단은 갈수록 부패해졌고 농민에 대한 착취가 더욱 심해져 '황건(黃巾)의 난'이 발발하게 된다. 이후 후한은 위(魏), 촉(蜀), 오(吳) 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참고] 사면초가(四面楚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사자성어로,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편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진나라가 무너진 이후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천하를 양분하여 패권을 다투었다. 항우가 한나라 군대에 패해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었을 때, 사방을 에워싼 한나라 군대 속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점령했다 여기고 슬퍼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는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에게 고향 노래를 부르게 한 한나라 장수 장량(張良)의 교묘한심리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항우는 오강(烏江)에서 자결한다.

6.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
농민반란인 '황건의 난'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후한제국은 화북 지역을 점거했던 위(魏)나라 조조(曹操, 155~220)에 의해 장악되었다. 아울러 쓰촨(四川) 지역에서는 유비(劉備, 161~223)가 촉(蜀)나라를 세웠고, 강남 지역에서는 손권(孫權, 182~252)이 오(吳)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위나라는 토지, 인구, 경제력에 있어 당시 중국 땅의 절반에 이르렀다. 이것은 삼국 중에서 위나라가 후한을 계승하여 뤄양에 도읍을 세웠기 때문이다.

화북 지역을 차지했던 조조는 후한의 마지막 왕인 헌제(獻帝)를 앞세워 정통성을 주장하며 천하를 호령하였다. 그 후 그는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결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적벽대전(赤壁大戰)'5)이다. 이 대전에서 패한 조조는 더 이상 강남 지역에 대한 병합을 단념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천하는 삼분으로 정립되었다.

이후 위나라에서는 지방 토착세력을 유지하던 호족(豪族)세력이 귀족으로 발전하고, 정치를 그들의 전유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6)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마의(司馬懿)는 유비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죽고 난 후 왕실이 약화된 촉나라를 병합하였고, 아울러 오나라도 병합하였다.

나아가 요동지방의 공손씨(公孫氏)를 정벌하였다.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삼국시대는 60여 년 만에 끝이 나고, 진(晉)나라에 의해 재차 통일되었다. 호족의 지지를 기반으로 세워진 진나라는 황실강화를 목적으로 왕자들을 지방의 요지에 분봉하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여 군사력을 키워나갔지만, 이것이 오히려 왕자들의 세력싸움인 '팔왕자(八王子)의 난(亂)(291~312)'을 초래하였다. 이어서 남흉노(南匈奴)의 유연(劉淵)이 한(漢)왕을 자칭하면서 '영가(永嘉)의 난'을 일으킴에 따라 진나라는 남흉노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 화북 지역에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세워진 이래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이어지는데, 이를 북조(北朝)라 한다. 한족(漢族)은 강남지방의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南京)]에 동진(東晉)을 세웠다. 동진이 건국되자 본토의 남방 토착 호족보다는 북방에서 내려온 피난귀족이 비수(淝水)대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더 우대를 받았다. 유유(劉裕)가 실권을 잡고 제위에 올라 송(宋)을 세웠지만 이후 송나라는 북위의 침범으로 제(齊), 양(梁), 진(陳)으로 이어지는데, 이를 남조(南朝)라 한다.

이처럼 북방의 호족(胡族)과 남방의 한족으로 세력이 양분되었으니, 이 시기를 남북조(南北朝)시대라고 한다. 이로써 북방민족과 한족간의 융합을 의미하는 '호한(胡漢)체제'라는 중국사의 새로운 역사가 열렸다.

7. 수(隋)나라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의 양견(楊堅) 문제(文帝, 541~604)는 황제권 강화, 남북융합의 민심안정과 부국을 위하여 '3성 6부(三城六部)' 제도를 채택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는 호족의 관직독점 제도였던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문벌귀족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기반으로 2대 황제인 양제(煬帝, 569~618) 시기에는 운하 사업과 대외원정을 추진할 수 있었다.

양제는 먼저 뤄양 천도를 결정했는데, 이는 뤄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통제하기가 매우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뤄양은 수륙 운수의 중심지이자 물자 저장이나 중계 운송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기존 수로와 하천을 연결하여 뤄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관통하는 네 갈래의 대운하를 건설하였고, 수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뤄양과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의 교통로를 정비하였다. 한편, 양제는 북방 변경을 위협하는 돌궐(突厥)과 큰 세력을 구축한 고구려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세 차례나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기록을 살펴보면 598년 문제가 30만 대군을 몰아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패했고, 양제는 612년(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613년, 614년에 걸쳐 세 차례나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역시 모두 패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재력과 인력소모로 경제적 파탄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민심이 동요되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로써 양제는 신하에 의해 살해되고, 통일된 수나라는 불과 38년 만에 멸망하였다.

 

태종(599~649)  태종은 북방민족을 정복해 영토를 두 배 이상 확장하고 조세·토지·군사 제도를 정비해 이후 중국 왕조 통치체제의

                         기틀을 닦았다. 그의 치세를 일컬어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한다.

 

8. 당(唐)나라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李淵)은 원래 수나라 양제의 신임을 얻어617년에 태원(太原) 유수(留守)로 임명된 후, 돌궐을 물리치고 농민반란을 막아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연은 수(隋)나라의 몰락을 예견하고 그의 아들 세민(世民, 이후 당 태종(太宗)이 됨)과 함께 거병하여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였다. 장안을 장악한 후 당 태종은 오긍(吳兢)으로 하여금 국정운영을 토대로 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태종과 간신(諫臣, 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하는 신하)과의 치국(治國)방법에 대한 문답을 기록한 것으로 이후 황제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태종과 그의 아들 고종(高宗) 시기에 율령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대외영토를 확대하여 '대당(大唐)제국'을 이룩함으로써, 오호십육국과 북조시대의 호한체제였던 것이 중화체제로의 대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당은 수나라의 3성 6부제도와 지방관(地方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정치적 효능을 제고하였다. 당나라 초기 60년간 동쪽으로는 한반도 북부,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부 등 광대한 변방을 지배 통치하였다. 이러한 대당 제국의발전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구축했다.

고종의 황후로 알려진 무측천(武則天)은 본디 고종의 황후가 아니라 태종의 후궁이었다. 무후(武后)의 자리에서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던 그녀는 690년 65세의 나이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 중국 고대 주(周)나라의 국호를 가져옴으로써, 당 제국을 '무주(武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무측천은 정치를 전횡하는 귀족문벌관료들을 타파하는 한편, 신진과거관료를 등용함으로써 귀족들이 다시는 발호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녀가 무후과 황제의 자리에서 통치한 45년간 농민반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혁신적인 사회개혁을 바탕으로 당 왕조의 안정을 공고히 했기 때문이다.

 

무측천(624~705) 잔혹한 살상과 천륜을 위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정치적 공헌을 인정받고 있다. 죽기 전 자신의 묘비에 아무것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측천의 뒤를 이은 중종(中宗)은 ‘당’이라는 국호를 복원하여 이때부터 다시 당 왕조가 이어지게 되었다

현종(玄宗)이 재위한 개원(開元) 시기 초기에는 문벌귀족세력을 억제하는 반면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경제적인 발전과 변방의 군사적 안정을 이룩할수 있었다. 그러나 개원 24년부터 천보(天寶) 연간에 걸쳐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인해 농민에게 실시해오던 균전제도가 붕괴되며 국가의 재정이 위협받게 되었고, 군사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부병제(府兵制)도 무너져 군의 사기와 군사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게다가 현종이 후궁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하여 점차 사치와 향략에 빠지면서 국정을 멀리하고 있었고, 여기에 사회전반에 누적된 모순이 폭발되면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주도한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다.

안녹산은 756년에 뤄양을 함락하고 스스로 대연(大燕)황제라 칭하며 9년 동안 황제 노릇을 했다. 이 시기 동안 탐관오리가 횡행하였고, 전란으로 죽은 사람 수만 3,6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국가전체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안사의 난을 평정한 것은 변방에 설치된 절도사(節度使)인 번진(藩鎭) 세력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에도 140년간 당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戰亂)의 피해가 화북 지역에 집중된 반면강남 지역의 피해는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도사 휘하의 사병(私兵)화된 군인 집단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져 이를 막기 위해 당 제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절도사의 횡포와 더불어 조정에서는 환관의 전횡이 날로 극심하였다. 환관이 추밀사(樞密使)에 임명되면서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지방군을 감시하는 감군도 맡게 되었다. 그들은 안사의 난 이후 금병 통수권도 장악하여 그 세력이 더욱 막강해졌다. 마침내 더 이상 환관의 전횡을 참지 못한 조정에서는 환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절도사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당 말기에 시행했던 소금 전매는 농민의 난을 자초하여 '황소(黃巢)의 난'을 야기시켰다. 그 이후 환관과 관료의 대립이 더욱 극심해지자 재상 최윤(崔胤)은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으로 하여금 환관세력을 제압하게 하였으나, 907년 주전충은 당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후량(後梁)을 세웠다. 그리하여 290년에 걸쳐 번성했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가 열렸다.

9. 송(宋)나라
후주(後周)의 절도사 출신인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진교역(陳橋驛)에서 왕위를 찬탈한 후, 960년에 황제로 등극했다. 송 태조(太祖) 조광윤은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 세력을 제압하고 안정된 통일국가 건설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을 위해 문신(文臣) 관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문치주의(文治主義)시대를 열었다.

중국 사회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정치·사회·경제분야에서 혁명적인변화를 가져왔다. 즉, 군벌사회였던 당말(唐末)과 오대(五代)에 걸쳐 황제권을 견제하였던 귀족계층이 사라지고, 사대부(士大夫)와 서민사회가 대두한 것이다. 군사조직도 부병제에서 직업군인 제도인 모병제(募兵制)로 바뀌고, 황제 직속인 금군(禁軍) 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황제권이 강화되었다. 태조는 문치주의 중앙집권체제로 화북의 안정을 도모한 후 963년부터 976년까지 강남의 10국을 점령하였고, 이후 동생 태종이 통일 대업을 이루었다. 강남 지역의 개발로 농업생산의 발전과 함께 차, 소금, 술 등의 전매제도를 시행하여 왕실의 재정 수입을 확보하였다.

태종은 오대(五代) 시기에 거란(요遼)에게 뺏긴 연운(燕雲) 16주(州)를 되찾기 위해 요를 공격하였고, 이로써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송나라는 요에게 계속 패하자 방어태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양국은 '전연(澶淵)의 맹약'(1004)을 맺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태종 시기 화북출신과 강남출신 관료의 대립으로 인한 붕당이 형성됨에 따라 정권싸움이 일어났다. 당쟁의 주된 원인은 과거제도와 관련이 있었다.

과거에 합격한 문신관료 사이에 인맥관계가 형성되어 파당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사회적 폐단에 대해 왕안석(王安石)은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으나 조정과 사대부들은 신구(新舊)파로 분열되어 통일된 정책 시행이 불가능했다. 신종(神宗)이 죽은 후, 10세의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북송의 당쟁은 격화되었으며 정치사회는 더욱 부패하였다. 게다가 요나라와 금나라에 대한 북방정책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급기야 금의 침입을 받아 휘종(徽宗), 흠종(欽宗) 두 황제와 3,000여 명의 황족, 고관이 잡혀가는 대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127년 북송이 멸망하자, 강남으로 피신한 고종이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杭州)]으로 수도를 옮겨 남송(南宋) 정권으로 이어갔다.

남송은 북송 때보다 영토 면적이 4분의 3 정도로 축소되었으나 강남 지역의 개발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금과 몽고7)에 계속 항쟁하면서 중국문화의 틀을 지켜나갔다. 금나라는 화북진출을 바탕으로 남송 정벌을 시도하였다. 이에 결사항전을 하자는 '주전파(主戰派)'의 한세충(韓世忠)과 악비(岳飛) 등이 금의 침입을 물리쳤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한 고종은 항복하고 화친을 맺자는 '주화파(主和派)' 진회(秦檜)의 화의론을 받아들이면서 화의론에 반대한 악비를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후 금나라와 남송은 군신관계가 되어 자손대대로 신하의 예를 지켜야 하는 소흥화의(紹興和議)를 맺게 된다. 1206년 몽골족이 일어나 서하(西夏)를 멸하고 남송과 동맹하여 금을 정벌하고자 제의했고, 이에 남송은 몽골족과 연합하여 1234년 금을 멸하였다. 그러나 남송은 몽골정예부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몽골군에 대한 수비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복당하고 말았다.

10. 원(元)나라
9세기 중반 위구르 제국이 붕괴되면서 몽골고원의 민족이동이 시작되었고, 이에 몽골족도 동북방면으로부터 초원으로 이동해왔다. 그 와중에 몽골 부족은 부족 간 항쟁을 거듭하면서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칭기즈칸(成吉思汗, 1162~1227)으로 잘 알려진 테무친(鐵木眞)은 케레이트 부족과 동맹을 맺고 몽골 부족의 지도권을 장악한 후 여러 부족을 차례로 병합하였다.

마지막으로 나이만족을 제압하여 몽골고원을 통일한 후 1206년 칸(汗)으로 즉위하니 이로써 대몽골제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칭기즈칸은 천호(千戶), 백호(百戶), 십호(十戶)의 십진제 군사조직으로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이를 기초로 하여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의 자제(子弟)들로 구성된 친위대를 조직하여 마침내 세계정복도 가능한 막강한 군사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의 대외원정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고, 그 목표는 남송을 멸하고 서역을 원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몽골제국이 지속적으로 정복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정복지의 분봉(分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배체제는 1206년 쿠빌라이(忽必烈)가 즉위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北京)]로 옮겼고, 국명을 원으로 바꾸었으며 중국 관료제를 차용하여 중국적 황제지배체제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남송을 멸하고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이 최초로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정복왕조를 세웠다. 원은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고급관료는 은음제(恩蔭制), 세습제, 추천제를 통해 문벌 중심의 인물선발을 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적 황제지배체제를 기본으로 한 행정기구인 중서성(中書省), 최고 군사기구인 추밀원(樞密院), 감찰기구로는 어사대(御使臺)를 설치하였다.

아울러 정복민을 통치하기 위해 철저한 민족차별정책을 시행했다. 제1계층은 몽골인, 2계층은 서역인(색목인色目人), 3계층은 화북민인 한인(漢人)으로 약간 우대하였고, 4계층은 끝까지 저항한 남송의 강남인으로 남인(南人)이라 칭하며 천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의 토대 위에 서역문화의 전파와 색목인의 활약에 힘입어 불교가 새로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티베트불교인 라마교가 크게 발전해 원나라의 지배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라마승의 지나친 횡포는 몽골사회의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아울러 원말에 이르자 민족차별을 심하게 받은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반란의 정신적 지주는 백련교(白蓮敎)였는데, 이들은 홍건(紅巾)을 머리에 둘렀다고 해서 홍건군이라 이름 붙여졌다. 반원(反元), 반(反)지주를 목표로 한 이 반란에서 곽자흥(郭子興) 군단에 가담한 주원장이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원의 세력을 물리치게 된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후불과 90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11. 명(明)나라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이민족인 원나라를 물리치고, 한족왕조인 명나라를 세워 원과 명의 교체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원나라가 남긴 유목민족의 문화를 한족문화로 부흥시키는 과제가 남겨졌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태조는 황허와 창장(長江)의 대규모 치수사업과 황무지 개간에 힘썼다. 또한 새로운 세제인 이갑제(里甲制)를 실시하고, 몽고의 풍속 습관과 언어를 금지시킴으로써 한족문화로의 전환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아울러 태조는 6부를 황제에 직속시켜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지만, 실제로는 내각대신과 환관세력이 더 강했다.

3대 황제인 영락제는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강남의 물자수송을 위해 조운체계를 완성하였다. 또한 남쪽으로 안남(安南, 지금의 베트남)을 복속시켰고, 환관 정화(鄭和)를 파견하여 남해원정을 단행하였다. 이것은 대외무역을 강화하고 화교의 동남아시아 진출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영락제가 특무기관인 동창(東廠)을 환관에게 관리하도록 함에 따라 환관세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명대의 환관은 전국각지에서 군사적 감독활동도 겸하게 되었다.

명 중기에는 몽고지방의 새로운 세력인 북로(北虜)가 북방을 위협하였으며, 동남해안에서는 왜(倭)에 의한 노략질과 왜구와 조공사신 간의 대립으로 약탈무역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거정(張居正)은 위기극복을 위해 몽고와 화의를 맺고 호시(互市)를 여는 등 혁신을 추진했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고 난 후 이갑제가 붕괴되면서 향촌사회의 질서를 신사층(紳士層)8)이 장악하기 시작하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앙정계도 파당과 당쟁이 만연했고, 관료들도 내각파와 반내각파(동림파東林派)로 나뉘어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후 동림파는 명말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을 제거하고자 개혁운동을 추진하였지만, 환관파의 정치투쟁에 휘말리면서 당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만력(萬曆) 시기(1573~1619)부터 과중한 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1627년 산시(陝西) 지역에 극심한 재해가 닥치자 산시 북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644년 농민반란군의 수령이었던 이자성(李自成)이 시안을 점거하고 국호를 대순(大順)으로 바꾸었다. 마침내 베이징으로 진격하여 자금성(紫禁城, 지금의 고궁박물원)을 함락했다. 이에 명의 숭정(崇禎)황제가 자금성 경산(景山)에서 자살하니 명나라는 276년 만에 멸망하였다.

12. 청(淸)나라
만주족인 누르하치(努爾哈赤)는 1616년 만주를 통일하고 예전에 만주족의 다른 이름인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을 세웠다. 1626년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 이후 청 태종(淸太宗)이 됨)는 만주와 요동지배에 그치지 않고 후금에서 만주족, 한족, 몽골족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발전시키고자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 때 이르러 청의 팔기군(八旗軍)이 1644년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격파한 뒤 명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이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청의 전성기를 이룩한 강희황제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 1654~1722)는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5세 때부터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오삼계(吳三桂)·상가희(尙可喜)·경계무(耿繼茂)의 세 번왕(藩王)이 일으킨 반란인 삼번(三番)의 난과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도모했던 정성공(鄭成功) 세력을 진압함으로써 진정한 중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강희제는 러시아 세력을 헤이룽장(黑龍江)에서 몰아내고 최초의 국제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옹정제(雍正帝, 1678~1735)는 '황태자밀건법(皇太子密建法)'이라는 청 왕조 특유의 왕위계승제를 제정했다. 또한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청의 영토를 파미르고원까지 확대했고, 동남아시아 버마와 베트남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청나라는 강희·옹정·건륭 3대에 걸쳐 130년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의 국가권력은 만주팔기군(滿洲八旗軍)이 중심에 있으나, 한인팔기군(漢人八旗軍)과 몽고팔기군(蒙古八旗軍)의 군사력을 전국각지에 배치하여 해당 지역 총독이 지휘하였다. 현(縣) 아래에는 향촌 자치조직으로 보갑제(保甲制)를 실시하여 치안을 유지하였다. 또한 지정은제(地丁銀制)를 실시하여 조세의 개혁도 단행하였다.

청은 통치정책으로 만주족의 풍습인 변발(辯髮)과 호복(胡服)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동시에 한인에 대한 회유책도 병행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전통문화를 담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 것이다. 또한 중앙의 요직에도 만주인과 한인을 같은 수로 임용하는 '만한병용(滿漢倂用)' 정책으로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건륭제 중기에 이르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유민(流民)으로 변하여 민간 비밀결사조직에 들어가 불법집단이 형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천지회(天地會)이다. 한편 원말 이후 오랫동안 이어온 백련교의 결사도 확대되었다. 이들은 관리의 탄압, 지방의 신사층, 지주계층에 저항하는 반관(反官)적인 성격이 강했다. 청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국가 예산과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였고, 이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난에 빠지고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출국이었던 대청제국은 아편 밀무역의 증가에 따라 수입국으로 지위가 변화하게 되자 아편의 수입, 판매, 흡연을 금지하였다.

그러자 아편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고 있던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鴉片戰爭)을 일으켰다. 1841년 영국군의 광저우(廣州) 점령으로 광저우 조약을 체결하였고,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의 조약체결로 인하여 대청제국은 주권의 일부를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청 정부가 아편전쟁 패배에 따른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국민들을 착취하자, 마침내 억압과 착취에 반항한 농민운동인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1851~1864)'이 폭발하였다. 한편 영국은 아편전쟁 후 개방된 청과의 무역이 여의치 않자, 1856년 다시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청에 전쟁을 선포하고 프랑스와 연합하여 광저우를 점령하였으며, 다음 해 톈진(天津) 조약을 체결하였다.

1989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치르고 나자,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세우며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와 배외(排外)운동을 주창한 의화단(義和團)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 애국민족운동인 의화단운동은 이후 대청제국의 통치에 타격을 입히고 마침내 혁명운동의 입지를 강화시켰다는 데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아울러 이러한 의식이 중국의 지식층에게 고조되면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기반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 1911년 10월 10일, 쑨원(孫文)의 동맹회(同盟會)가 중심이 된 우창(武昌) 봉기가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이다. 쑨원이 중화민국(中華民國)을 건립함으로써 수천 년간 이어져온 군주 전제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공화정치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중국 역사연대표
왕   조시기

하(夏)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상(商)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주(周)

서주(西周)

   기원전 1046~기원전771

동주(東周)

춘추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기원전 476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75~기원전 221

          진(秦)

   기원전 221~기원전 206

한(漢)

전한(前漢)

   기원전 206~서기 8

후한(後漢)

   25~220

삼국(三國)

위(魏)

   220~265

촉(蜀)

   221~263

오(吳)

   222~280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65~589

수(隋)

   581~618

당(唐)

   618~907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

송(宋)

북송(北宋)

   960~1127

남송(南宋)

   1127~1279

원(元)

   1271~1368

명(明)

   1368~1644

청(淸)

   1644~1911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1949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1949. 10. 1.~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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