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화

이슬람교의 성립과 발전

sunking 2013. 12. 11. 23:09
               

아래의 글은 이길상 교수의 문화강좌 중 일부이다

이 교수는 연세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거쳐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한국 교육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교육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연구 교수와 세계한국학대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환태평양한국학국제학술회의(PACKS)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세계 20여 개국을 방문하여 해외 한국학을 지원하고 외국 교과서의 한국 관련 서술을

개선하는 활동을 했다. 주요 저서로 《Exploring Korean History through World Heritage》

《미군정하에서의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 운동》《20세기 한국 교육사》

(2008년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다.

 


 

이슬람교의 성립과 발전 1

 

문화적인 측면에서 지역을 구분할 때, 흔히들 쓰이는 것이 공통의 문자와 종교가 필수적으로 따르며,

그 외에 제도와 관습이 첨가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랍 문화권 또는 이슬람 문화권이라고 하면

아라비아어와 이슬람교가 공통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분류로 본다면 이슬람문화권 내지는 아랍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은

서 아시아의 대부분과 중앙아시아 일부, 그리고 북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발칸반도 일부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필리핀의 일부가 여기에 해당되는 매우 넓은 지역이다.

 

오늘날 세계의 어떤 지역을 막론하고 이들의 문화적인 혜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단적인 예가 아라비아 숫자로서, 2진법이든, 10진법이든, 12진법이든, 60진법이든 간에

이 편리한 숫자가 없으면, 더하기도 빼기도 나누기도 곱하기도 할 수 없으며,

한다 해도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 역시 한자와 마찬가지로 외래문자다.

한자가 외래문자라 하여 한글 전용운동을 펼치면서도 이 숫자에 대해서만은 어떤 반대도 없었다.

이미 세계의 공통기호가 된 이 문자의 효용성에 대응할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지역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아주 빈약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따라서 이 지역을 이해하는데도 어려움이 많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

 

1. 천일야화(千一夜話 : Alf laylah wa laylah)

 

이란계 아리아족이 세운 아키메네스왕조(Achaemen dyansty)의

페르시아제국(Persian Empire : 550 ~ 330 BC)이

알렉산더대왕에게 멸망된 후, 파르티아(Parthia, 247 BC ~ 226 AD)왕국이 일어나

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로마제국과 중국의 중간지점에서 교역로를 장악하고, 번성하다가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 : 208 ~ 651)가 일어나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400년 이상 지배하면서 수도 (크)데시폰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특히 호스로1세(531~579)의 학예진흥은 동 로마학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여

그리스의 고전문화를 계승, 보존하였다는 점에서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제 서 아시아는 이란계의 아리아 족에서 아라비아의 셈어계로 버튼을 넘겨주게 되었다.

따라서 다리우스, 키루스, 샤푸르, 호루스 등의 이란계의 왕명 대신에, 예언자 마호메트(무하메트),

이슬람(모슬렘, 무슬림), 이슬람교, 코란, 칼리프, 술탄 등의 아라비아 용어를 자주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아라비아의 말 가운데 지명이나 인명 등에는 알 아 등이 앞에 붙는데

이것은 영어의 the, a, an, 등과 같은 관사(冠詞)라고 생각하면, 그런데로 무난하며,

이름 앞에 이븐(ibn)이라는 말이 수없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姓)이 없는 그들 사회에서 그저

"아무개" 혹은 "아무개 아들 누구"라고 이해하면 무난하다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이 우리들에게 그 남아 친숙하게 만든 것이 신비(神秘)와 요술(妖術),

문학적인 감미(甘美)와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憧憬)으로 대표되는

아리비안 나이트(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아라비안나이트라고 하지만 그 사실은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이 지역을 지배했던 여러 왕조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문학작품 이전에 이 지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천일야화(千一夜話)가 본명인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주요 이야기만도 180편,

거기에 100여편의 짧은 이야기가 곁들여 있다. 이런 많은 이야기가 하루 아침에 이룩된 것은 아니고

6세기경 사산왕조 때 페르시아에서 모은 천의 이야기가 8세기 말경까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며,

여기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다시 많은 이야기가 추가되었고

그 후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여, 15세기경 현존의 것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많은 이야기의 작자는 한 사람도 알려진 것이 없다.

페르시아에는 인도로부터 많은 설화가 들어왔으므로 이 이야기에는

인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 등의 갖가지 설화가 포함되어 있고,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영향도 있는 듯하며 그 구성 또한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아랍어와 이슬람 사상으로 시종일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천일야화란 천 하고도 하루 밤(1001 夜)의 이야기란 뜻인데,

그 주인공은 사산왕조의 샤푸리 야르왕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자청해서 시집간 신부(新婦)

셰헤라자데가 당장 내일 아침에 죽지 않기 위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가장 재미있는 대목에 가서는 "오늘 밤은 피곤하니 이만 자고 나머지는 내일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인들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내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요즘의 연속극을 보듯이 밤이 되면 이야기를 하고, 궁금함을 남긴 체 이야기를 끊었다가,

다음날 밤에 다시 이야기하고.... 이렇게 해서 천 하루 밤을 넘겼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고 전한다.

 

페르시아의 절대권력을 행사한 왕이, 아내에게 배신당한 앙갚음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을 증오하여,

신부를 맞이하고는 결혼 다음날 아침에 신부를 죽여버렸다.

이러한 신부의 살인행각은 신부의 후보가 없을 때 까지(처녀의 씨가 마를 때 까지) 계속한다고 호언하였다니

누가 왕비되기를 바랐겠는가?

 

그리고 신부 감을 가진 부모들 역시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이 때 셰헤라자데라는 어질고 착한 고급관료의 딸이 자진해서 왕의 신부가 되어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왕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마음에서 그녀를 죽이지 못했고,...

이야기는 1천 1밤 계속되었고, 드디어 왕은 종래의 생각을 버리고 셰헤라자데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신드바드라는 자가 일곱 번씩이나 인도양에 나아가 갖가지 위난을 극복한 끝에

바그다드의 부호가 되는 것을 비롯해서, 연애 이야기·범죄 이야기·여행담·신선담·역사 이야기·교훈담·우화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프랑스의 A.갈랑이 불역판(佛譯版)을 내면서(1703)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없었던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등의 이야기를 아랍어로 번역,

임의로 여기에 삽입하여 서방세계에 알려지자 신비와 호기심은 도를 더해갔다.

 

실제에 있어서는 "오말 부느 안 누만왕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가 전체의 8분의 1을 차지하는데

내용은 우마이야왕조의 이슬람 제국과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을 주제로 하고

여기에 많은 연애담과 모험담 등을 곁들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실제의 내용은 샤푸르왕의 재세기간을 훨씬 넘긴, 십자군(十字軍)과 이슬람교도와의 격돌 일화,

또는 그 시대의 분위기 등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11세기에서 13세기,

혹은 그 이후까지도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전편을 통하여 가공의 세계와 실재(實在)의 세계가 뒤섞이고,

인물도 역사상 인물과 가공의 인물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실제 인물의 왕으로는

아바스왕조 제5대왕인 하룬 알 라시드가 나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바그다드가 가장 많고 카이로·다마스쿠스·바스라 등도 자주 나오고,

동(東)으로는 중국, 서(西)로는 이베리아에 까지 미치고 있는 것도 있다.

유럽에서는 갈랑 이후 영국인 R.F.버튼이 완역(完譯)한 버튼판 "아라비안 나이트"가 나왔고(1885∼88)

이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도 번역 본이 나왔다.

 

2. 아라비아 반도(Arabian Pen-半島)

 

아라비아 반도는 아시아대륙 남서부에 있는 큰 반도로서, 북서단~남동단 약 2,200 km.

동서 너비 약 1,200 km. 면적 약 300만 km2로서 한반도의 약 14배. 동쪽은 페르시아 만과 오만만(灣),

서쪽은 홍해(紅海), 남쪽은 아라비아해(海)와 아덴 만(灣)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사막지대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의 사하라로 이어지는 대(大)사막지대의 중앙부를 차지한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의 사우디아라비아, 북동 쪽의 쿠웨이트, 남쪽의 예멘, 남동쪽의 오만,

동쪽의 아랍에미리트·바레인·카타르의 7개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홍해 연안을 따라 산맥이 이어져 있으며 남쪽에 이를수록 고도가 높아져

예멘에는 3,760 m의 높은 봉우리도 솟아 있고, 이 산맥과 홍해 사이에는 티하마라고 불리는

좁은 대상(帶狀)의 저지가 이어져 있으며 대단한 혹서(酷暑)와 서열(暑熱)로 알려져 있다.

 

인도양 기슭에도 하드라마우트 산맥이 동서로 뻗어있고 남동쪽 오만에도 아하다르 산맥이 달리고 있는데

해발고도 3,000 m가 넘는다.

오만과 하드라마우트 사이의 내륙이 룹알할리(Rub' al-Khali:공허지대)라고 불리는,

면적 약 65만 km2에 이르는 대사막이 생물의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전개되어 있고,

반도 전체가 큰 대지이며 북 동쪽을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열사와 모래먼지는 숨을 막히게 할 뿐만 아니라 시력에도 장애를 주어 대낮에도 전조등을 켜고

운행하는 차량을 심심하지 않게 볼 수 있다니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지역이다..

 

이러한 아라비아 반도를 예부터 3구역으로 구분한다.

시나이 반도에서 지금의 요르단 일부를 포함한 아람 족의 거점이었던 페르단의 유적이 있는 곳을

바위의 아라비아라고 하고 서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 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사이에 펼쳐진 소위 시리아사막의 통상 도시 팔미라가 있는 곳을

사막의 아라비아라고 한다. 즉 아라비아 반도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상의 아라비아는 로마제국과 파르티아·페르시아의 세력범위에 있었던 곳이다.

 

나머지하나 이른바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하는 곳은 현재의 아라비아 반도로서,

염열과 죽음의 사막으로 그 오지는 잘 알려지지 않아 신비에 쌓여 있었다.

다만 그 남서부는 강수량이 비교적 많고, 일찍부터 여러 왕조가 교체(交替)했는데,

이를 야만(예멘)이라 불렀고, 아라비아 말에 "유문"은 행복을 뜻한다고 한다.

이래서 행복한(유문=야만) 아라비아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나 보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리던 아라비아 반도의 서남쪽 야만은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영향으로 비가 많고, "사막의 아라비아"로 불리는 북쪽은

지중해의 습기가 봄·가을 두 계절에 영향을 미쳐 약간의 비를 몰고와 곳곳에 오아시스를 만드나,

대부분의 지역은 극도로 건조하여 고대부터 그렇게 불렀다.

 

동부 페르시아만(灣)의 연안지대는 원래 바다였던 곳으로 그 시대의 식물·동물이

수 km의 깊은 층을 이루며 침전되어 세계 제일의 유전지대를 형성하였고,

지금은 그 황량한 땅에 알라의 영광이 깃들여 퍼내는 원유는 세계경제를 웃고 울리고 있어서

현대판 알라딘의 램프가 나타나 풍요와 영광을 그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3. 아랍 어(Arabic language)

 

아랍 어란 셈 어족(語族)에 속하는 아라비아어를 말하는데,

현재 약 1억의 인구가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의 언어로서, 이슬람교의 전파 지역을 따라 곳곳으로 양자를 가서

아랍문화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표현력이 뛰어나고

비교적 보수적이어서 매우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다.

 

이 언어에는 문어(文語)로서 고전 아랍어와, 구어(口語)로서 많은 방언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고전 아랍어는 문어로서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담화에도 쓰이는 코란과 고대문학의 언어가 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상적 회화에 쓰이는 아랍어는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이것을 회화체 아랍어라 부른다고 하며,

현재는 문학의 발달과 고등교육의 보급에 따라 점점 고전 아랍어가 확대되어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관습적으로 이 언어는 자신의 고유한 문자로 쓰여지는데, 이 문자는 이슬람 세계는 물론

그 밖의 몇몇 나라에서도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이슬람교의 성립

 

사막의 신들

 

아랍 족의 역사를 보려면 그들의 본거지를 셋으로 나누어 보는게 편리하다.

첫째는 야만(예멘)과 하드라마우트(Hadhramaut) 등의 남서부로서,

거기에는 사바(Saba : 시바,Sheba) 여왕의 전설로 유명한 사바나(Sabaeans)·힘야르(Himyar) 등

몇 개의 왕국이 일어나서 거대한 돌을 쌓아올려 댐을 만들고 관개를 해서 농경을 하였고,

독특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훌륭한 신전이나 왕궁 등을 세웠던 사실이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그 내용이 밝혀지고 있다.

 

둘째는 알바디아라고 불린 아라비아의 북부, 특히 지금의 시리아 사막이나 요르단 방면에 걸쳐서

페트라의 나바타이 왕국(BC 4세기∼AD 1세기), 그 후 팔미라 왕국, 가산 왕국, 라흠 왕국 등의 국가들이,

이른바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로마와 파르티아,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세력다툼에서

때로는 이편으로 때로는 저편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동족끼리 싸운 예도 허다 하다고 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하였고

그리스나 페르시아 문화를 아라비아에 도입하는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중부 네지드나 서부 헤자즈 지역으로 수많은 베드윈족(Bedouin)의 유목 부족이 있었고,

곳곳에 발달된 오아시스에는 농경을 주로 하는 定住民들이 잡거(雜居)하고 있어서,

마호메트 이전에 이 지역을 통일한 국가는 없었다고 전한다.

사회구성은 부족단위로 되어 있었고, 대개 6개의 신분계급이 있었는데,

유목민이 가장 웃자리이며, 농경을 천하게 생각하였고, 노예도 있었다.

 

국가적인 보호가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 자기 부족에 대한 충성심(아사비아)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저절로 발달하였으며, 그 이상의 국가관념 같은 것은 없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다신교도로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은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었는데,

이렇게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사회를 하나로 묶어서 서로 다투지 못하게 한 것이

메카에서 태어난 아라비아 최대의 인물로 추앙받는 예언자 마호메트(570 ~ 632) 였다.

 

메카는 황량한 민둥산에 둘러 싸인 골짜기에 발달한 도시이긴 하나, 그 주변의 많은 험한 산과 동굴,

검은돌(Black stone)과 소금기 머금은 우물 잠잠(Zamzam)이 있어서, 영험과 기적을 찾아

수많은 순례자가 모여드는 성지(聖地)였고,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인도양과 지중해를 잇는 홍해가 활기를 띄자, 홍해의 항구도시 지다에서 80Km 정도 떨어진

메카 역시 상업과 무역으로 번성하여 헤재즈 지방 제1의 도시로의 면모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따라서 메카는 종교도시이면서,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춘 훌륭한 도시였던 것이다.

 

현재도 이슬람의 순례자들이 수없이 찾아드는 카바신전(Ka bah)은 마호메트 시대만해도

높이가 사람의 키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지붕도 덮지 않았으나 7세기 초에 개축하여

북동 쪽으로 면한 정면과 그 반대쪽은 폭 약 12 m이고, 다른 두 면은 약 10 m, 약 15 m정도의 높이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리석 기초 위에 회색 돌로 쌓아올렸으며, 정면 입구에서 내부로 들어가면 본전에는 나무기둥이 즐비하고,

천장에는 금·은으로 된 램프가 매달려 있다고 하며, 동쪽 모서리에는,

지면으로부터 1.5 m 정도 높은 곳에 검은 돌(黑石)이 끼워져 있다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아담이 천국에서 신과 인간과의 계약증거품으로 가져온 것을,

후에 아브라함이 카바를 건설할 때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Cabriel)한테서 받았다고 전하며,

또 알라신의 손가락 끝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이 이 신전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 중에는

마호메트 이전에 있었던 신체(神體)의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또한 운석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카바 서쪽 모서리에도 흑석과 똑 같은 높이의 위치에 복돌(福石)이라고 불리는 돌이 박혀있으나

흑석(黑石)만큼 유명하지는 않고, 흑석이 있는 모서리의 반대쪽에 잠잠(젬젬)이라고 하는

깊이가 42m 정도의 약간은 짠 소금기 머금은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성천(聖泉)이라 하여,

위에는 둥근 지붕을 덮었고, 오랜 옛날부터 이 우물 부근이 신성시되어 아라비아인 신앙의 중심으로서

카바신전이 세워졌다. 이 카바신전은 영원성(永遠性)을 맡아보는 즈하르(토성:土星)를 제사하였기 때문에

수 많은 변천 속에서도 멸망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즈하르 외에도 고대 아랍 인들이 가장 숭배했던 신으로는 후바르(Khubar)와 그 밑에 세 여신

즉, 알 라트(al-Lat), 알 웃자(al-Uzza) 그리고 마나트(Mannat) 등이 있었는데,

메카의 유력한 집안 코레이시(쿠라이시 : Quraysh, Koreish)족은 알 웃자 여신을,

상록의 도시 타이프(Taif) 주민들은 알 라트 여신을, 야스리브(Yathrib:현 메디나)의 주민들은

마나트 여신을 각각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이외에도 뇌신(雷神) 쿠자이, 사랑과 미의 여신 앗즌, 검은 머리를 한 거인과 같은 알파르사드,

돌로 변한 별의 신 사아드, 태양의 여신 샴스, 사랑과 우정의 신 왓드 등이 있었다고 하며,

마호메트가 태어날 무렵 카바에는 후바르 이하 수십개의 많은 신상(神像)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이슬람의 절대 유일신 알라(al Lah)의 신상도 있었다.

 

(2) 예언자(nabi) 마호메트(Mahomet : 570? ~ 632. 6. 8)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는 유럽의 발음이고,

아라비아 원음으로는 무하마드(Muhammad)라고 하며, 이슬람교도는 보통 라술라(Rasullah),

즉 "알라의 사도"라고 부른다.

 

상업과 무역, 신성(神性)으로 가득찬 메카에서 마호메트가 태어난 것은 570년 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코끼리의 해"에 출생하였다는 전승(傳承)에 따르는 것으로서,

570년경 아비시니아군(이디오피아)이 코끼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남(南)아라비아(예멘)로 침입해 왔으므로,

이것을 근거로 그의 출생연대를 추정한 것이다.

 

그의 집안은 5세기경 황야에서 이주해와 이 도시의 지배권을 쥐고 있던 코레이시족 중에서도

지체 높은 하심(Hashim) 집안이 였다.

그러나 당시의 하심 집안은 가난해서 아브두 샴스 가문(후의 우마이야 가문)이나,

마하즈무 가문 등 부유한 가문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집은 카바 근처의 골짜기 밑에 살고 있었는데, 밑에 살수록 격이 높고, 열 여섯 집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전 부친 압둘라가 병사하여 유복자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도 수년 후에 별세했기 때문에,

마호메트는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조부의 사망 후로는 숙부 아브 탈리브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메카의 부상(富商)밑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주인을 따라 시리아등지를 왕래하였으며,

이 시절에 유다교와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와 접하고,

그 나름의 신앙이 자리잡았다고 보고 있다.

 

그 후 주인이 죽자 그의 미망인인 하디자 밑에서 일하는 도중, 마호메트의 성실함에 큰 감명을 받은

하디자의 구혼으로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595).

이 때 마호메트는 25세, 십여 세 이상의 연상인 하디자(당시 하지다의 나이는 40 ?)와 결혼함으로서

가난한 청년에서 일약 메카의 부호가 되었으며,

이로써 종교적인 정열을 펼칠 수 있는 경제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외견상 평온을 유지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3남 4녀를 두었으나 남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만으로 이슬람이라는 신앙의 근원을 만들 수는 없었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천성적인 매력(魅力)은 사람의 마음,

특히 여성들의 마음을 잡아서는 놓지 않는 인품이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이 세상 부인(婦人)들의 위대한 애인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

이슬람신앙을 만든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호메트 쪽에서도 결코 부인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마호메트는 아줌마 오빠부대를 거느린 인기인이 되었다는 것이며

이런 사정을 어느 이슬람학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여인들로부터 정열적인 지지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귀의(歸依)를 얻어서,

이슬람이라는 신앙을 통하여 이것을 보존시킨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잡았고,

이들 여인들이 그의 성공과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라고......

 

그런 면에서 그의 많은 아내 중 하디자와 아이샤(Aisha)는 다른 아내들보다 기여한 바가 많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의 성공도 이 두 여인의 헌신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열매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610년경 마호메트가 40세 되었을 때, 그는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고,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부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에 들면 날개 달린 천마가 그의 앞에 나타나고,

그 천마를 타고 가면 예루살렘의 큰 바위에 내리고, 그 바위에서 마호메트가 무릎 꿇고 기도드리면,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를 인도하는데, 빛의 사닥다리를 타고 제7천으로 올라가서

화살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알라를 뵙고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새로운 교(敎)를 창시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부인 하디자가 최초의 이슬람(참다운 믿음?)이 될 때 신자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고,

3년 후에 40명, 10년 동안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얻지 못하였다.

 

다. 이슬람의 세계

 

(1)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로서,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신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고, 이 가르침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설교하여 교단국가가 등장하였는데,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회교, 청진교(淸眞敎)라고 하였으며,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리고 있다.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일부다처, 성인의식으로 치루는 할례(割禮), 남자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이상한 모자,

여인들이 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리는 겉옷, 식사는 오른손으로 용변 후 뒤처리는 왼손으로,

하루에도 메카를 향해서 수없이 행하는 기도, 구성지게 읊조리는 코란의 독송(讀訟) 등

그 모두가 경이와 신비, 호기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못지 않은 경이로운 신비가 있다면, 한 사람의 신자로 출발하여 10년동안

겨우 100명 정도의 신자밖에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12억의 세계인구가 믿고 있는

거대 신앙으로 자리잡았다는 그 자체를 신비와 경이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메카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불모지 골짜기가 인도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인 동시에 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 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巡禮者)들이 찾아들었고,

빈부(貧富)의 차이도 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메카에도 그 영향이 미쳐 크리스트교도 유다교도 아닌 하닐라(Hanila) 라는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하니프(Hanif)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다신교(多神敎) 신당에 빠져, 돌·천체·샘·수목 등을 숭배하고 있었고,

하니프들은 세계의 종말과, 선한 자는 복을,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하닐라는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이를 선전하였다.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 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갖고

이슬람을 창시한 마호메트의 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어떤 형태로든 받았다고 보고 있다.

 

"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歸依)" 는 알이슬람을 설파하고,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라고 하는 등 그의 이상한 언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자

메카의 집권 층인 코레이시족은 이른 바 혹세무민이라 하여 박해를 가했고,

그럴 때 마다 그의 충실한 신자인 동시에 연상의 아내였던 하디자가 이를 잘 무마해 주었다.

그런 그녀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남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619?),

 

그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이를 피하여 마호메트는 그의 친구이자 열렬한 신자인

아부 바크르(Abu Bakr)와 함께 아부쿠바이스산 동굴에 몸을 숨기고,

아부 바크르의 딸 아스마가 허리띠를 풀어서 동굴에 매달아 내려주는 물과 음식을 먹고 연명하기를 수년,

622년 9월 이런 위기를 피해서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야스리브(메디나)로 갔다.

 

이 메디나행(行)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을 정도로

이슬람교의 중요한 고비가 되었다. 그의 메디나 행에는 많은 신도들도 동행하여 정든 고향 메카를 떠나

메디나(야스리브로)로 피난하였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일대 전기(轉機)가 된 헤지라가 이를 테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는 것이다.

 

메디나는 메카와 달라서 사람들은 가난하였고, 이슬람에 귀의하는 자가 많아 무슬렘이 불어나게 되었다.

이에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이주해간 교우(아스하아브)들, 즉 무하지룬(單數:Muhajiru: 複數 Muhajirun)과,

메디나 협력자들(안사르)의 힘을 합쳐 교단(敎團:움마)을 조직하였고,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초가 되었으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은 국가로, 다시 세계제국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2) 메디나의 마호메트 그리고 그의 여인들

 

마호메트는 이 메디나에 머무는 10 여 년 간 12명의 아내를 맞이하게 된다.

이미 메카시절에 하디자가 죽은 후, 두 여인과 혼약을 맺었는데 그 하나는 그의 외가 쪽 숙모 뻘이 되는

사우다라는 과부였고, 다른 하나는 마호메트의 가족이외에 최초로 이슬람에 귀의하여

평생토록 예언자와 친구의 정을 나눈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 였는데,

약혼 당시 아이샤의 나이는 불과 여섯 살의 어린애였다.

 

메카에서 박해를 피해 아부쿠바이산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물과 음식을 날라다 준 아스마는

아이샤의 배다른 언니였으며, 이미 아이샤는 다른 청년과 약혼하고 있었으나,

예언자가 구혼(求婚)하자 그 부친 아부 바크르는 약혼자측의 양해를 구하고 파혼한 다음

친구이자 교주인 마호메트에게 선뜻 딸을 내주었다.

 

예언자가 죽은 후 아부 바크르는 초대 칼리프(할리프)가 되었고,

아이샤는 "신앙의 어머니"가 되어 이슬람교도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는 것은 훗일담이다.

어쨋거나 쉰 살이 가까운 예언자가 여섯 살의 동녀(童女)와 약혼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결국 이 동녀는 삼 년 후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쉰 살을 넘긴 마호메트와 결혼하여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10년,

예언자 마호메트는 이 어린 신부와 결혼한 같은 장소에서 그의 가슴에 안긴 체 숨을 거두기 까지

이슬람의 교리는 확립되고 아라비아의 운명도 바뀌었으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역사까지도 바뀌게 되는 엄청난 힘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이미 마호메트는 일단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메카의 대상(隊商)들은 습격,

바드로의 싸움에서는 무하지룬과(86명) 안사르(238명)가 힘을 합쳐 약 천명의 메카 군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624. 3)

 

이 때 마호메트 편에서도 14명의 회생자가 나왔고,

그 중에는 메카이래의 유력한 신도인 우마르(이븐 알 핫타브 : Ibn al Khattab)의 딸 하프사(Hafsa)의 남편도

전사하였으므로, 우마르는 20 여세에 과부가 된 딸의 혼처를 여러 곳에 수소문 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마호메트가 이를 받아들여 결혼하여(625. 2) 아내로 삼았고,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오호드(Ohod : 무후드)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메카의 유력한 집안인 아부 수피안(Abu Sufean)가(家)가 쳐들어 왔는데,

메디나의 북쪽 오호드의 언덕 아래에서 양 쪽이 혼전을 거듭하여, 많은 회생자를 내게되자

1년 후 다시 결전할 것을 다짐하고 메카 군이 물러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모하메트는 다시 자이나브(Zainab)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녀의 전 남편 역시

바드로의 전투에서 전사한 과부로서 마음씨가 매우 착하여 "가난한 자의 어머니"라는 애칭을 받았다고 하며,

이로써 예배당 곁에 있던 예언자의 검소한 집은 점점 흥성거리게 되었으나

이 마음씨 착한 자이나브는 8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마호메트의 여섯 번 째 아내는 메카의 코레이시족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마하즘 집안의 힌드란 부인이었다.

그녀의 전 남편 아부 사라마는 오호드전투에서 부상당한 것이 덧나서 죽게되자 이 여인과 결혼하였다(626.3)

 

이 여인에게는 전 남편과 사이에 이미 몇 명의 자녀가 있었다.

예언자가 일곱 번 째 아내로 마지한 것은 자프시의 딸 자이나브 였는데, 이 결혼에는 꽤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여인은 모하메트와는 동족으로 4촌 누이벌이였는데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가지 못하자,

자기의 노예였다가 해방시켜 양자로 삼았던 자이드와 결혼시켰고,

 

어느날 예언자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가 미태를 부리자 예언자는 마음이 동하였고,

뒤 늦게 이 사실을 안 자이드는 겁을 먹고 이혼하여 규정된 4개월 후에 예언자에게 보냈다.

 

627년부터 629년 사이에 마호메트는 또 다른 다섯명의 아내를 마지하게 된다.

그 다섯 명 가운데 가장 먼저 온 것은 메디나에 있었던 유력한 유다교도 부족인 나디르족 출신의

라이하나라 불리는 미녀로, 같은 유다족교도인 쿠라이자족 젊은이와 결혼한 몸이 였으나

마호메트가 그 일족을 멸망시켰을 때 과부가 된 것을 맞아들인 것이다.

 

또 하나는 사피야라는 열 일곱 살 난 미 소녀였는데, 그녀도 유다교도로 라이하나와 같이

마호메트에 의해 멸망된 메카북쪽에 있는 하이발시의 키나이족의 여자였다.

그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것을 마호메트가 거두어 아내로 삼았던 것이다.

세 번째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금발의 미녀로서 동로마의 이집트총독이 선물로 바친 노예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대 이집트인종으로서 크리스트 교도가 된 코프트파(Copts)에 속하는 크리스찬이 였기 때문에

정식 아내로 인정되지 않았고 여자노예의 신분으로 있었으나,

메디나에서 이브라힘(Ibrahim)이라는 아들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세 명의 이교도 중 사피야만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정식 아내가 되었다.

 

628년 또 다른 두 여인과 결혼. 메카의 최대 명문가인 코레이시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 있는

우마이야 집안의 장로(長老) 아부 수피안의 딸 탐라와,

자기 백부 압바스(al-Abbas)의 처제인 마이무나라는 여인이 그들이다.

 

이것은 다분히 정략적이 였으나, 후일 후계자문제를 두고 그 심각성은 이 하렘(후궁)속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탐라의 부친 아부 수피안은 메카의 유력자로서 오호드전투 때 메카군을 지휘하여 이슬람과 싸웠고,

이 전투에서 예언자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627년 3월에는 다시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메디나를 포위하여 예언자가 위기를 맞았으나, 이른바 참호전쟁(battle of the ditch)이라고 부르는

한다크(참호)를 돌아가며 파고 잘 막았기 때문에 2주일 후 메카군은 돌아갔다.

 

이것을 전기로 해서 이번에는 이슬람군이 공세로 나오고 메카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630년 1월에는 메카를 정복한다.

1월 11일 마호메트는 알카스와란 이름의 낙타등에 올라타고 카바신전으로 들어가,

흑석에 지팡이를 대서 경의를 표하고 신전을 왼쪽으로 일곱 번 돈 다음에,

그곳에 모셔진 수십개의 신상(神像)을 쓰러뜨리라고 명령하여,

주신(主神) 후바르의 거대한 신상이 땅을 울리며 쓰러졌을 때, "진리(하크)는 왔다. 거짓은 멸망했다.

진실로 거짓은 멸해 버린 것이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코란 제 17장 83절)

이래서 카바신전은 알라의 신전이 되었고, 최대의 강적 아부 수피안이 항복한 것은 메카가 함락되기 직전이 였다.

 

아부 수피안의 딸 람라는 그 일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박해받고 있을 때

이슬람에 귀의하고 있었고, 아버지에 의해서 행해진 이슬람 박해를 피하여,

한 때 그 남편과 함께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의 아비니시아(이디오피아)고원으로 피신해 살다가

거기에서 남편이 병사하였고, 과부로 있다가 마호메트와 결혼한 것은 628년 봄,

그의 나이 35세 때 였다고 하는데, 이때는 아직도 그녀의 부친 아부 수피얀과

예언자 마호메트가 생사를 걸고 싸울 때 였으니, 아버지의 정적과 결혼한 셈이다.

 

마호메트는 629년 봄 26세의 미녀 마이무나와 사실상의 마지막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마호메트의 숙부 압바스의 처제였고,

용장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Khalid ibn al-Walid)의 숙모이기도 했다.

할리드는 메카군의 용장이 되어 오호드전투와 한다크전역 때에는 메카의 기병대를 이끌고

이스람군을 수없이 괴롭혔으나, 이슬람에 귀의하여 마호메트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쳐 예언자로부터

"알라의 검"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예언자 마호메트는 메카에서는 아내가 연상의 하디자 하나 뿐이 였으나

메디나에서는 11명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들을 보면, 6살에 약혼해서 9살에 결혼한 아이샤는 비록 처녀이긴 하였으나

파혼의 경력이 있었고, 이집트의 동로마총독이 선물로 바친

17살의 금발의 미녀 마리아는 노예신분이 였으며,

그 나머지 아내들은 과부로서 전 남편과 사별했거나 이혼하여 마호메트와 결혼하였는데

전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을 둔 여자도 있었으나, 막상 마호메트의 자녀에 관한 기록은 남긴 것이 없고,

유일한 혈통으로는 외손자 두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마호메트를 호색한이라고 일부일처제 사회에서는 비난을 하는데,

이곳 유목민 사회에서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될 수 없다.

황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오아시스를 잃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오아시스를 두고 부족간의 치열한 전투는 생사를 결정 짓는 중대성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고

심하면 전 부족이 몰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럴 때 남편을 잃고 갈 곳없는 가련한 여인들을 거두어 아내로 삼아 생을 영위시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의 은총이다......

 

물론 마호메트의 아내 중에는 정략 결혼도 있으나 대부분은 전쟁 미망인을 거두었고,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삶은, 호화로운 궁전에서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의 궁녀 속에 묻혀 살면서,

궁녀의 처녀성을 보장하기 위해 환관으로 궁중 일을 사역시키는 오리엔트의 여러 군주에게는

오히려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유력한 호족들과 제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구잡이 식 결혼을 하여, 정식 왕비가 25명, 거기에 후비를 합치면 도합 29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역사에서 왕건을 호색한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정도(正道)라는 것이다.

 

632년 2월에 거행된 메카의 대제(大祭)는 마호메트 자신이 행사를 지휘하여

미나의 골짜기에서 모여든 군중을 향하여 낙타등에 올라 앉아 일장의 설교를 했다.


"... 모든 모슬렘은 형제입니다. 여기 모인 사람은 모두 평등합니다...."


이 간단한 언어 속에서 그의 사상을 엿 볼 수 있고, 이러한 그의 사상이 교단국가라는 보기 드문

이슬람제국을 지탱해준 사상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나의 대제를 고별 순례라 한다. 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와, 병들어 눕자

여러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 아이샤의 방에서 정양하다가 해 뜰 무렵부터 정오사이의 어느 시간에

고통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63세의 육신을 아이샤의 부축을 받아 몸을 반쯤 일으킨 체 임종하여

파란 많은 그의 영혼은 유일신 알라 옆으로 날라 올라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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