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2.08 10:49 | 수정 : 2013.02.09 13:25


일요일 오후 설잠에서 깬 기자는 지인에게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유명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건네 들으면 상대가 무안해질 정도로 ‘지나친 농’이라 치부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믿기 힘든 팩트’로 빨리 인정하게 됐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곁에서 본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사람이고, 더욱이 너무나 사랑하는 두 아이가 있지 않은가. 일단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처럼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왜 전화했어? 언론에서 오보를 냈구나.”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딱딱한 기계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봤다.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는 힘든 현실을 극복하려는 듯 애처롭기만 했다. 두려운 마음으로 접속한 인터넷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기사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끝내 카카오톡 메시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파리 떼가 귓속을 헤집고 다니며 윙윙거렸다.

지금 나는 태풍 한가운데 서있다
기자와 조성민이 처음 만난 것은, 그가 현역에서 은퇴하고 야구해설자로 활동을 시작했던 즈음이었다. 그는 당시 최진실과 이혼 후 새로운 삶을 만나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기자들에게 그는 꼭, 반드시 인터뷰를 해야 하는 인터뷰이였다. 수많은 다른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번번이 거절하던 그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는 단박에 응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요청이 아니라, 그의 화려했던 야구인생을 생생히 증언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거 기억해요? 요미우리에서 투수로 있을 때 당신의 선전에 국민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 당신이 얼마나 많은 재일교포들에게 희망이었는지? 당신이 1승을 올릴 때마다 국적을 속이던 재일교포들이 잇따라 커밍아웃을 했는지? 그리고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핑클의 멤버들도 당신이 이상형이라고 말했어요. 저는 누구의 전남편이 아니라, 야구인 조성민을 만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빨리 전화를 끊어버릴까 하는 요량으로 건성건성 대답하던 그의 목소리가 달리진 건 그때부터였다.
“정말요? 정말 그때 그랬어요? 정말 그 시절 나를 사람들이 기억해요?”
그는 자신의 선수 시절을 기억해주는 기자에게 감동을 받았는지, 인터뷰를 하게 되면 반드시 당신과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두어 달 뒤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받은 비난의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았던 터라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하러 가던 길에서 걷다 마주친 행인이 팬이라며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하자, 기자에게 “이거 모두 시킨 거죠? 짜고 이러는 거죠?”라며 얼떨떨해할 정도였다.
그 이후 기자와 조성민은 기자와 취재원이 아니라 이따금씩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또한 그는 기자의 사적인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의 삶이 점차 궤도를 찾아가고 있을 때쯤, 그에게 또 한 번의 비극이 찾아왔다. 전처 최진실이 세상을 떠났다. 곧이어 두 아이의 친권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의 의사는 아무런 관계없이 언론의 뭇매를,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그는 당시 기자와 만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이렇게 호소했다.
“얼마 전 TV에서 우울증 자가 테스트가 소개되길래 유심히 살펴봤더니 내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걸로 나오더라.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 환희 엄마 49재 하루 전날 갑산공원에 다녀왔어. 그날 묘비 앞에서 한참을 이야기했어.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물어봤어. 그리고 처음 결혼할 때의 마음이 변한 것, 외롭게 혼자 가게 한 것,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한 것 모두 미안하다고. 하지만 내 진심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어봤어. 지금 나와 아이들은 모두 태풍의 한가운데 서있어. 얼마나 외롭고 위험한지,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몰라. 사람들은 말하지. 이 문제는 단지 우리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그리고 두 아이는 누구 한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자식이라고. 사람들의 관심이 고맙긴 하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실이 되는 게 싫어. 아이들이 자라면 모두 상처가 될 거야.”
아이들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살아생전 그는 뜬금없이 “내가 정말 나쁜 놈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달을 보라고 가리키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고 절규했다. 그러다 제 풀에 지쳐, 억울한 것도 할 말도 많지만 아이들을 위해 모든 걸 껴안고 살아가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최진영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야 했다. 한동안 껄끄럽기만 했던 고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 씨와도 간간이 만나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상담했다. 세상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환희가 편식을 해서 너무 속상해. 그래서인지 영 키가 자라지 않아. 골고루 먹어야 하는데 햄이나 고기만 먹으려고 해. 준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 그런데 공부를 잘 안 하려고 해. 가수가 되겠다고 하는데, 걱정이야.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그는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언론의 공세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1년 전쯤 기자가 일본 출장을 다녀왔을 때 그에게서 수차례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언론에서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사생활을 들추고 있다”며,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분노했다. 당시 그는 재혼한 부인과 불화를 겪고 있어 별거(그는 결국 지난해 3월 재혼한 아내와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다) 중이었는데, 언론에서는 그가 사업을 도모하기 위해(이미지 세탁을 위해) 거짓으로 아내와 불화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지인들을 취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면전에 악다구니 써가며 비난했던 사람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플을 달았던 네티즌들. 그리고 자극적인 기사와 제목으로 그를 힘들게 했던 수많은 언론사들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고 일어섰지만, 그때마다 그의 앞에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자신을 환영해주거나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당당한 아빠로 살아가기엔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길 잃게 만든다고 그는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5년 전에도 4년 전에도 최근에도, 그는 아이들에게 당당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고는 전화를 걸어 “맛있는 라면이나 떡 등을 판매하니 지인들에게 홍보 좀 부탁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추운 겨울날 길거리나 아파트 단지를 돌며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다. 그는 그때부터 어린이 야구캠프교실을 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진정한 야구인이고 싶어 했다.
“나는 말이야 누구나 편안하게 찾아와서 야구를 즐길 수 있는 야구장을 만들고 싶어. 그 야구장에서 가족들이 바비큐도 구워 먹고, 야구도 하는 거야. 우리 환희랑 준희도 그곳에서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밝게 건강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 난 그게 가장 큰 소망이야.”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사소한 오해로 서로 연락이 뜸해질 무렵 들려온 소식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생전 “형이라고 불러.”라며 기자에게 유일한 형을 자처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에게 해줄 것이 있다면 명예를 되찾아주는 일이다. ‘야구선수 조성민’으로 말이다. 고 최진실의 전남편, 두 아이의 아빠로만 기억되기엔 아깝다. 누가 뭐래도 조성민은 강한 어깨를 가진, 150㎞의 강속구를 던지는 멋진 투수였다.
故 조성민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2010년 10월, 조성민은 환희와 준희에게 쓴 편지가 있다고 귀띔했다. 기자가 그 편지를 보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심사숙고 끝에 이메일로 아이들에게 쓴 편지를 보내왔다. 기자가 짐작건대 이 편지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2010년 11월호 본지에 실렸던 편지를 다시 공개한다. 부디, 두 아이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환희에게
시대, 나라, 장소, 이름, 부모.
사람이 태어날 때 이런 것들은 원한다고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너도 그랬지.
아빠가 못나서 어린 나이에 많은 일들을 겪었고 상처를 받았지.
아빠는 네가 잘 자라주기를 바란단다.
그래서 아빠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몇 자 적어본다.
강하게, 밝게, 친절하게, 박력 있게…. 무엇보다 그것이 제일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상처 주는 사람보다 상처받는 사람이,
속이는 사람보다는 속는 사람이 되렴. 그 편이 좋단다.
환희는 분명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거야. 아빠가 그랬으니까…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도 겪을 것이고 좌절의 아픔도 겪을 것이다.
아빠도 그랬단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용기 내어 꼭 붙잡길 바란다.
살다 보면 기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억울한 일이 많을 것이다.
욕심도 생길 수 있고 남에게 네 것을 빼앗길 수도 있단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뿐인 너의 인생이 빛날 수 있게 살아가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라는 것을 너도 가끔씩 배워가겠지.
남자로서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무슨 일이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산다는 건 즐거운 일이란다. 힘들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힘들고 괴로울수록 가슴을 펴고 앞을 보렴.
어딘가에 너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아빠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널 지켜주고 있을 거야.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준희에게
네가 언젠간 어른이 되어 아빠 품을 떠날 때
누구보다 멋진 여자가 될 수 있게 아빠는 너의 울타리가 되고 싶구나.
역사는 여자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준희가 멋진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남자들은 여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단다. 아빠도 몸소 체험했단다.
위대한 여자는 위대한 남자를 만들고, 바보 같은 여자는 바보 같은 남자를 만들지.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여자로 태어난 것이 이득일 수도 있단다.
부끄러워 말고 삐뚤어지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가렴.
괴롭힘을 당하면 큰 소리로 울고, 난처해지면 얼굴로 웃어주렴.
공부 같은 건 안 해도 된다고 하면 할머니한테 혼나겠지?
지식은 교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단다.
기쁜 일도 화가 나는 일도 난처한 일도
현명하게 판단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며
진정으로 밝게 웃을 수 있는 미소를 배우길 바란다.
상대방의 눈을 보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난처한 일이 생길 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렴.
너도 언젠가는 연애를 하겠지?
그러면 꼭 그 녀석을 아빠에게 보여주렴. 아빠는 남자니까 보면 알거든….
한 세 번 정도는 망가뜨려 줄 거야. ^^
아빠가 정말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그 사람 옆에 서있는 네 자신이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갔으면 하는 거란다.
아빠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네 인생에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삭막한 세상에서 내 딸이 행복해지길 바라서란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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