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대학 1년 여자선배의 글이다.
나는 그림을 전공하여 서교동에 있는 미술대학을 다녔고
선배는 인근에 있는 서강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여행지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애기들을 이렇게 가끔씩 자기와 인연이 된 친구들에게
이메일로 글과 사진을 보내주는데 내용이 곱고 정갈하다.
글을 예쁘게만 쓰려고 하지 않고 현장감이 있도록 기술하여
부담없이 끝까지 읽도록하는 마력을 지녔다.
아마 생각이 아름답고 진솔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이번 가을, 남녁의 사찰을 중심으로 여행을 다녀와 글을 남겼다
선배는 그동안 여행지에서 보고 느꼈던 바를 여러 책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죽로산방에서 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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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찾아 남녘으로
황금빛 비지리 다랭이 논, 운문사의 저녁예불, 영남 알프스의 억새평원, 석남사 부도탑
친구야,
이제 이 땅엔 가을이 찾아 왔어.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 풍성함의 계절,
그 한가위가 지난지도 한달이 되오고 있단다.
9월에 윤달이 들은 탓인가. 한치의 오차도 없는 계절의 변화는
올 따라 단풍 소식이 조금 늦게 들리는 것 같아.
엊그제 다녀 온 오대산 단풍도 단풍찾아 온 손님에게 인사치례 정도.
오늘 내가 찾고 있는 남녁이야 아직도 한참 시간은 지나야 알 것 같단다.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노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익어 고개숙인 가을의 논.
담밖으로 삐져나온 붉은 단감, 그리고 바람에 흐느끼듯 날리는 은빛 억새벌판,
이 가을들이 보고 싶다 노래하는 네 목소리가 들리는듯 해,
매일매일 여행 공지를 드려다 봤지.
이 모든 걸 한번에 충족하게 할 여행지가 올라 오려나 하고...
그 모든 것이 합하여 네게 보낼 선물 꾸러미를 보내기 충분한 여행지가 올라왔고,
너무 반가와 여행길에 올랐어.
내 여행지를 잘 따라 와야해. 잠시 방심하면 길은 어긋나고 마는 거니까.
오늘의 처음 도착지는 경주. 그저 멋모르고, 신라의 도읍지,
많은 문화유적지를 갖고 있는 고도. 가장 잘 알고 있는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맞아. 띠엄띠엄 알고 있는 역사의 단편적인 쪼가리 지식만 짜깁기해도
꽤 많은 양의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친구야.
세월이 흐르고, 그 세월만큼 보이는 것 보다는 느낌으로 다가 오는 것이
훨씬 많아지고 있음을 알게 됐어.
기차를 타고 앉아 스쳐만 지나도, 이 땅이 갖고 있는 향기가 느껴지곤 하지.
이 땅이 키워낸 흔들리지 않는 결연한 의지의 상징처럼, 소나무들은 튼실하고,
몸을 감싼 나무의 껍질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개가 느껴진단다.
경주의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님도 계시지?
오늘 찾은 용산서원 초입 마을 동산 소나무도 그랬어. 참 놀라운 기개란다,
용산서원이란 현판의 서체가 어찌나 힘차고 멋지던지,
네게 보여주기 위해 우선 한 컷,
이 편액은 당대의 최고명필이었던 옥동 이서(1662-1723)의 글씨라 했어.
조선중기 (1568-1636) 최건립이란 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래,
서원이라면 문인들의 몫이었지만 이분은 노구를 끌고 병자호란시
전장에서 참여,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한 무인.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
윤기가 나도록 반짝이게 잘 관리가 되어 있었지.
-얼룩백이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굳이 정지용 시인의 시가 아니더라도 어린 날, 시골에서 자라난 그 뿌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너른 벌판과 영글어 익어가던 황금빛 논자락은 그대로 향수가 되고 있겠지.
너도 몇번이나 내게 말했어. 행여 가을 여행 떠나거들랑 그림처럼 사진을 보내달라고.
TV나, 책이나, 원하면 찾을 수 있지만 내 친구의 눈에 비친 논자락을 보고 싶노라고.
고불고불 산자락 들자락을 이어가며 만들어 놓은 경주 비지리 다랭이 논,
논 사이 둔덕 길을 걸으며 평균대 위를 걷던 실력을 되살리며 넘어지지 않으려
비틀거린 것도 내겐 유년의 추억을 더듬는 것이었지?
"내가 논둑길 걸었던 적 있던가?"
아니, 그런데 왜 난 있지도 않은 그 추억을 찾고 있었을까. 아마 어느날인가
네 입을 빌려 나왔던 추억의 한 토막 속에서였는지도 몰라. 노란 수채화처럼 물든 논도,
유화처럼 짙게 물든 논도, 구름에 가려 어두운 담황색이 되 버린 논도, 다 담아 냈지.
그 안엔 네가 있었으니까.
운문사 명품 소나무, 한 뿌리에서 우산처럼 저런 모양의 소나무가 만들어 졌답니다.
가을이면 스님들이 막걸리 12말을 거름으로 부어 준답니다.
우리들의 숙소인 운문산 자연휴양림에 짐을 풀고,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에 위치한 운문사를 찾은 시간은 저녁 어스름.
고구려 평원왕 2년 (560) 어느 도승에 의해 창건된 오갑사란 이름의 사찰이
오늘날 운문사의 출발이라 했어.
우리나라 최대 비구니 강원으로 이름난 이 사찰은 200여명이 넘는 여승들의 예불로도
이름난 곳이라고 하더구나.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는 곳, 짙은 향이 퍼지던 소나무 길의 끝자락,
운문사 승가대학이란 커다란 현판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어.
입구를 통해 보이던 사찰의 모습은 어찌나 정갈하고, 맑은 모습이었던지.
깨끗이 비질된 티끌하나 없는 절집 마당,
발빠르게 움직이는 비구니 스님들의 발자국 소리가 경내를 깨우고 있던 무렵,
내 발자국 소리가 행여 스님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하진 않을까 싶을 만큼,
적막과 고요에 쌓여 있었지. 서서히 어둠이 내리며 아주 옅은 노을이 물들고,
종종 걸음을 옮기던 어리디 어린 비구니 스님들이 법고를 두드리며
예불 전 의식을 치루고 있을 때,
눈길을 멈출 수 없을 만큼 청아하고 청초하던 어느 어린 승려에게 그만 넋을 뺏가고 말았다니까.
차마 놓칠세라 종종대며 걷는 스님의 뒤를 따라 나도 그만 종종 거리고 말았다구,
어쩌라고? 나도 몰라. 그냥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옅게 피어있던 티없이 여리던 그 미소가 너무 맑고, 영롱해서 그랬던지.
문득 '승무'라는 시 한귀절이 떠 올랐단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이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외라
왜 고운 걸 보면 우리는 서러워질까?
법고를 두드리고 있는 두 어깨가 마음을 짠하게 하더구나.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 방울이야
세상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생각나니? 이 시를 외우며 깔깔대던 기억.
"얘, 뺨이 복사빛일 땐 번뇌도 별빛처럼 예쁜건가봐라며 웃던 일.
오늘 봤던 그 예쁜 스님의 미소가 그랬어.
초롱거리는 별빛 같았다고. 이제사 시인의 마음이 읽혀지는 것 같았다구.
대웅전 법당에 촛불이 켜지고, 비구니 스님들이 하나 둘,
하얀 고무신을 벗고, 법당으로 들어 갈 때,
가슴을 여미고, 대웅전 뒷뜰에 앉아 스님들의 예불 소리를 들었단다.
우리들의 귀에야 그레고리안 성가가 익숙하지만
스님들의 예불소리와 성직자들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하늘을 향한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것으로야 하나라는 것.
깊은 산사에서 자연 속으로 녹아드는 예불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더욱 절절한 느낌을 갖게 했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운문사 사찰을 만날 수 있던 시간,
그 도량의 기운이 너무 경건했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스님들의 예불을 따라 가고 있더라니까.
스님들의 모습, 내가 한순간에 반해버린 예쁜 스님의 미소.
운문사 경내에 내려앉은 고요와 적막 그리고 경건함,
인간의 번뇌라는 것, 언젠가 다시 널 만날 때,
주저리 주저리 네게 쏟아 놓을 얘기거리 많이 담아왔어.
여행의 밤, 여행 카페의 열번째 생일, 생일 케익을 구워냈다는 머핀님,
휴양림, 깊은 산 속, 야외 식탁에 차려진 멋진 대형 케익과 와인,
조촐하지만 의미있는 늦게 차려진생일 상.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여행 카페의 더욱 더 예쁜 발전을 위해 밝혀진 촛불 앞에서 기도했단다.
영남알프스의 천황산을 찾은 건 다음 날, 오전.
가지산, 운문산, 신불산, 영축산, 고헌산, 간월산, 천황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7개의 산군이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 영남 알프스, 가을이면 이 곳이 하얗게 피어나는 억새밭이
장관이라는 곳, 해마다 가을이 오면 영남 알프스 억새밭이 신문마다 도배를 하는 곳,
은빛으로 빛나는 그 억새평원을 찾아 나섰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기 위해 밀양 얼음골에서 케이블카로 이동,
산은 충분한 단풍은 아니었지만 드넓은 평원에 펼쳐진 하얀 억새가
우리를 맞아 주고 있었지. 간간이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 부딪는 소리가 멋진 음악을 연주해 주기도 했고.
지나는 풀섶에 피어난 청보랏빛 용담도, 연보랏빛 쑥부쟁이도 자줏빛 꽃향유도,
하얀 구절초도 억새의 은빛 물결에서 지나는 이의 눈길을 뺏곤 했지.
가을 속으로 발길을 잡아끌던 숲속의 오솔길도 더 할 수 없이 고즈넉하고 좋았어.
숲 속 나무 사이사이로 바춰들던 금빛의 가을 볕은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
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니까.
산 정상 가까이, 억새 밭 사이에 마련된 쉼터엔 테이블과 벤치가 준비되어
간단한 야외 식탁을 차리기에 충분했어.
삼삼 오오 모여앉아 가을 산의 향기에 젖어들 무렵,
"자, 이만 출발입니다."라는 그 말. 그건 언제나 아쉬움이지.
그 아쉬음은 미련을 남기고.
언젠가 다시 찾으리라, 과연 그 언젠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러나 희망을 갖게해서 좋아.
맞아, 기약은 할 수 없지만 우리도 언젠간 다시 만나,
기나긴 얘길 나눌 수도 있을테니까.
엄나무로 만든 여물통 같은 것은 스님들의 공양을 담던 곳이랍니다.
다음? 우리의 행선지는 가지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를 찾아서.
영남의 9봉중 가장 높은 가지산 (1240m) 자락에 있는 석남골 들머리에 있는
비구니 사찰.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 청도 운문산의 운문사와 함께,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름난 삼대 사찰의 하나인 곳.
단아한 일주문을 지나 침계루에 이르는 길은 울창한 숲길이었지.
물들지 않은 나무들에 가을 색은 완연했고,
가지산에서 흐르는 맑고 푸른 계곡의 물소리와 싱그러운 나무 냄새 만으로도
가슴이 빵빵해지는 것 같았단다.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에 (824) 도의선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 오는 절,
언젠간 도위선사에 대해선 조금 더 공부해서 얘기 해 줄 것이고,
그러니, 운문사보다는 한참 뒤에 지어진 절집이겠지?
도량은 그다지 넓지는 않았고, 임진왜란시 파괴된 도의선사가 세웠다는
15층 석탑은 지금 이것저것 남은 기단과 탑신을 모아
1973년 옛날 있던 자리에 다시 복원해 세운 것이라고 했지.
그 석탑엔 스리랑카에서 갖고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했어.
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며 겪어내야 했던 인고의 시간들,
그것이 임진왜란이 됐던, 북에서 내려왔던 6.25 사변이 됐던,
이 도량이라고 온전했을라구.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말끔한 절집의 정갈한 건물들은 대부분,
근래에 들어와 중건 됐거나, 개축 또는 신축 됐을 것이야.
15층 석탑에 보다 내 눈길이 머문 곳은 대웅전 뒤편
언덕 위에 세워진 도의선사의 부도탑이었단다.
아름다운 부도로 손꼽히는 신라 말기의 부도탑의 하나.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라고 전해지기는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던 탑,
울창한 소나무 숲 앞에 고즈넉이 서 있던 그 탑에서
천년의 향기가 느껴졌다면 넌 과장이라 할까?
아냐, 그 탑 앞에 서면 너도 모르게 그 세월이 주는 향을 맡을 수 있을거야.
렌즈 속에 잡힌 어느 젊은 여인들의 모습에서 삶의 무상을 봤다면,
뭔 소리냐고? 내 눈엔 그랬어.
네게 보여준 비지리 다랑이 논도 좋았고, 천황산 사자평 억새평원도 좋았지만,
엊저녁 운문사의 예불과 예쁜 스님의 미소, 오늘 석남사 도의선사의 부도탑은
아주 오래 기억 될 것 같아.
흩어지는 구름처럼 무상할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삶을 바라보게 해서 였을까?
다음 여행길에 또 초대할께. 그때까지 안녕.
언제나처럼 오늘 여행도 역시 최고였지.
무심재 여행만이 갖을 수 있는 맛과 멋, 넌 어땠어?
여행지에서... 너의 벗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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