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이근호 연구교수가 쓴 글이다.
이 교수는 현재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죽로산방에서 서pd
박문수는 영조 대 소론계 당인이면서도 항상 공적인 입장을 우선시했던 인물이었다.
실무에도 밝아 국가의 재정이나 군사 부분 개혁을 주도하였다.
박문수의 암행어사 활동은 사실과 다소 간극이 있으나,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그는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암행어사로 자리할 것이다.
전설 속의 박문수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국왕의 명으로 몰래 지방관을 감찰하고,
그들의 비리를 척결하던 관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암행어사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전도사였다. 오늘날에도 구전되는 각종 전설에
암행어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암행어사가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사또의 수청 문제로 생사를 오고 가는 순간에 극적으로 나타나 옛사랑을 구원하는
이몽룡도 암행어사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암행어사는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면 어디에선가 나타나서 이를 해결해줄 것 같은 백성들의 로망이었다.
조선시대에 많은 암행어사가 있었다. 그러나 유독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명사인양 말해지고 있다.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요, 박문수 하면 암행어사로 대표되고 있는 것이다.
박문수와 관련해서는 많은 구전설화가 있으나, 그 가운데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일대에서 조사된
암행어사 박문수의 활약상을 전하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세 아들 가운데 막내만이 혼례를 해서 며느리를 들였다, 하루는 부자가 일찍 여읜 부인의 제사를 마치고 집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며느리 방에 불이 켜져 있어 들어가 보니 며느리가 누군가에 의해 칼을 맞고 죽어 있었다.
이를 본 부자가 냉큼 방으로 들어가 먼저 칼을 뽑아들고 있었는데 마침 이 광경을 며느리를 모시던 몸종이 보고는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살해했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시아버지는 부인했으나 칼을 들고 있던 모습 때문에
영락없이 범인으로 몰려 감옥생활을 하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마침 박문수가 어사로 이곳을 지나다가 소문을 듣고는 살인사건이 발생한 집에서 하루
머물면서 부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리고는 살인사건 당시 부자가 빼들었다는 칼을 보았다.
칼을 보게 된 박문수는 이것이 중들이 쓰는 장도칼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다음날 박문수는 칼을 들고 인근의 무량사라는 절에 가서는 기지를 발휘해 그 절 소속 중 가운데 범인을 잡아
부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이런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니, 박문수는 그야말로 암행어사 계의 레전드가 아닐까.
백성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박문수, 사실(史實)과 설화 사이
이처럼 박문수와 관련된 많은 암행어사 설화에서는 잘못된 평판이나 소문의 진실을 밝히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그려지거나 때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백성을 구명하여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의의 심판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실제 역사 속에서 박문수가 정작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는 점을 알면
이런 이야기에 대해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었다. 1727년(영조 3) 9월의 일로,
이때 박문수는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임명되어 영남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암행어사는 그야말로 암행을 하는 어사였으나,
박문수는 이때 어사의 직함을 띠고 다음 해 3월까지 안동을 비롯해 예천, 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도내 명망 있는 인사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졌다.
사실 이때의 어사 활동으로 박문수는 다음 해에 곤경을 처하기도 하였다.
즉 1728년 이른바 무신란(戊申亂 혹은 李麟佐亂이라고도 함)이 발생하였는데,
난을 주도한 영남 지역 인사 가운데 한 명이 정희량이었다.
그런데 마침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하면서 정중원(鄭重元)의 상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정중원의 아들이 정희량이었다. 반대세력으로부터 박문수가 영남을 순행하면서
거사를 모의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혐의였다. 이처럼 역사 기록을 보면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된 적은 있으나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역도 영남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지금 구전되는 박문수 관련 설화는 비단 영남에 국한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제주나 강화도까지도 관련 설화가 전하고 있으니, 그의 인기를 가히 실감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설과 사실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박문수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라 생각된다.
1727년 박문수가 영남에 어사로 파견되어 활동할 때 환곡을 백성들의 삶을 위한 밑천으로 돌렸고,
탐관오리들을 다스렸으며, 바닷가 고을에 명망 있는 인물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거나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백성들에게 많은 어사나 암행어사가 있었음에도 박문수라는 이름이 각인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후대에 내려오면서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것이라 하겠다.
당론에 충실하면서도 ‘공(公)’을 우선한 소론계 당인
박문수가 관직 활동을 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이 격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박문수는 소론의 당색을 가지고 당론을 가장 추종하던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 점은 1741년(영조 17) 반포된 신유대훈(辛酉大訓)에 대한 입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신유대훈은 영조의 왕위 계승과 관련해서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의 논의 절충을 통해 발표된,
정치 현안에 대한 결정 문안이었다.
신유대훈이 반포되자 박문수는 노론 측의 김용택과 이천기를 역적의 죄로 단정한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김용택과 이천기는 노론 측 인물로, 경종연간에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을 지지하다가
1722년(경종 2) 목호룡의 고변에서 국왕을 시해하려고 했다고 하여 죽임을 당했다.
신유대훈의 반포로, 역적으로 죽임을 당했던 김용택과 이천기가 이제는 충신이 되었다.
이에 박문수는 김용택 등이 이미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종의 모의를 하였으며,
경종의 신하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들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론 당론을 추종하던 강경 소론들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점차 노론으로 정치의 주도권이 옮겨져 가던 시기 박문수의 이 같은 정치적 자세는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데 한계가 되었다.
그가 사망하던 시기에 작성된 실록의 졸기에는 “이광좌를 사표로 삼아 지론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영조실록])”고 하였다.
이광좌는 영조 대 전반 소론의 영수에 해당하는 인물로,
그에 상대하던 노론 측의 영수는 민진원(인현왕후의 오빠)이었다.
이렇게 강경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던 박문수였으나,
당론보다 앞섰던 것이 ‘공’을 우선시하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반대당이었던 양주 조씨 조태채와의 관련 일화가 전하고 있다.
조태채는 경종 대 신임옥사 때 죽임을 당한 노론 측 4대신 가운데 한 명인 만큼
박문수와는 정치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주지하듯이 영조 대는 이른바 탕평책이 정치운용술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탕평채는 이때 만들어진 음식이라 한다. 영조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탕평책 하에
관료 생활을 하던 박문수는 어느 날 대궐에서 숙직하며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반찬으로 콩나물이 나왔다. 그러자 박문수는 콩나물 대가리를 꼭 떼어버리며
“콩나물 대가리는 어차피 잘라버려야 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콩나물을 한자로 표현하면 ‘太采(태채)’가 되는데,
그 음이 조태채(趙泰采)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이렇게 조태채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박문수였으나,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에게 보여준 다음과 같은 자세는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조관빈은 박문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정치 활동을 하였다. 한번은 조관빈이 극형에 처해질 위기가 있었다.
이때 박문수는 국왕을 알현하고는, “조관빈이 지극히 흉악한 죄를 지었으니 죄상으로 보아서는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하나 지금 말해지고 있는 일 정도로는 죽일 사안이 아닙니다."라며
관대한 처벌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조관빈은 경의 원수가 아니오!”라며 의아해 하였다.
박문수가 이어서 “사적으로는 원수이오나 공적인 판단으로는 죄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관빈을 죽이고 싶으시다면 신 문수의 원한을 갚기 위해 죽였노라고 중외에 포고한 다음 죽이소서”라
하였다. 결국, 조관빈은 박문수의 요청에 의해 사면되게 되었다.
비록 반대당 인물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개인적인 감정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공적인 입장을 우선시한 것이라 하겠다.
균역법 제정의 일등공신, 박문수
박문수는 또한 뛰어난 실무관료이기도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사망하였을 때 작성된 졸기에서,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와 호조에서 바로잡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병조판서로 재직하면서는 국왕 호위군의 약화를 보완하기 위해 용호영창설을 주도하였다.
호조판서로 재직 시에는 국가 재정에 대한 정비를 주도하였고 그 결과물인 [탁지정례]를 편찬하였으며,
균역법의 제정에 공을 세웠다.
18세기 중반 경 양역은 백성들이 느끼는 가장 커다란 민폐 가운데 하나였다.
잘 알려진 폐단인 족징(族徵), 인징(隣徵), 황구첨정(黃口添丁),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었다. 양역 문제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라든지 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 대책으로 여러 가지 안들이 논의되었고,
국왕도 몇 차례 조정 신료들과의 논란뿐 아니라 궁궐 문 앞에 서울의 유생이나 시전 상인들을 모아놓고
정책에 대한 가부를 묻기도 하였다.
이때 박문수는 호조판서로 일련의 정책 결정 과정을 주도하였다.
1750년(영조 26) 5월 19일, 이날도 국왕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나아가 유생과 평민들을 모아 놓고
양역에 대해서 물었다. 이때 논의에 부쳐졌던 안은 호포론과 결포론이었다.
본래 양역은 사람을 단위로 하여 부과되던 것인 데 비해 호포론은
가호(家戶)를 단위로 포를 징수하자는 것이고, 결포론은 토지를 단위로 포를 징수하는 논의였다.
이때 논의에서는 호포론이 유력한 안으로 결정되었는데 그 막후에 바로 호조판서 박문수의 막후 노력이 있었다.
박문수는 이 밖에도 화폐문제를 해결하고자 청나라 화폐를 수입하자고 하거나 은으로 화폐를 주조하자는 등
각종 경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정책 입안과 추진에 참여하였다.
이 같은 박문수의 죽음에 대해 영조는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에게 관직을 추증하였는데,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맺음말에 갈음한다.
“아! 영성(靈城;박문수의 봉호)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예로부터 군신(君臣) 중에 비록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중략)… 이 소식을 듣고 보니, 슬픔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으랴? 더욱 애석한 것은 벼슬이 경재(卿宰)에 그친 것이다. 이것이 어찌된 연유이겠는가? 뜻은 대개 당(黨)을 비호하였기 때문이었다. 아! 영성이 이미 갔으니, 그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가? 아! 무신년에 충성을 다한 것이 어찌 삼재(三宰 : 의정부 좌우참찬)에 그치고 말 것인가? 이미 옛 전장(典章)이 있으니, 어찌 아뢰어 결정받기를 기다릴 것인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의정(議政)에 추증하여 나의 옛날의 공을 생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영조실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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