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장헌세자 사후 정조를 앞서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후일의 진종)를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하였다. 사실 여부야 어찌 되었든 장헌세자가 죄인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아들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계통을 바꾼다고 해서 장헌세자와 정조의 부자 관계가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명분상으로는 죄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허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세손이지만 세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는 영조 말년 경인 1775년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갖가지 방해공작이 이루어져,
정후겸 등이 정조를 해치려고 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투서하거나
그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괴한이 침입하여 염탐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리청정이 결정될 당시에는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라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제기하며 세손의 권위에 흠집을 내면서
대리청정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 정조가 비록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였다.
학습과 훈련을 통해 향상된 정치리더십
리더십은 천부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생후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제왕학(帝王學)은 정치리더십을 향상시키는 학문체계라 하겠다.
제왕학은 모든 군주가 갖춰야 할 학문을 말한다.
조선시대 군주들이 학습하는 제왕학은 정치의 득실과 인물의 능력, 민생의 고락을 파악하는
현실적인 학문으로, 학습을 통해 터득한 논리는 정치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할 수 있었다.
정조의 경우도 이 같은 제왕학의 학습체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정조는 1752년 출생 이후 원손으로 책봉된 후 왕세손->동궁->국왕 등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지위가 바뀔 때마다 교육도 내용과 격을 달리하였는데,
보양청 교육->강학청 교육->시강원 교육->경연 교육 등의 네 개 과정이 이에 해당되었다.
성장 과정에 지속적인 교육 과정이 동반되었다.
정조는 이들 과정을 통해서 유교의 주요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와
조선시대 제왕학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성학집요]나 [정관정요] 등을 학습하였다.
정조는 이와는 별도로 할아버지 영조의 훈육도 받았다.
영조는 국왕이 신하에게 교육받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왕이 직접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를 가르치려고 한 국왕이었다.
영조는 정계는 물론이고 학계까지 주도하는 군주가 되려고 하였으며,
그 이념은 유학에서 이상적인 사회라 말해지는 삼대(三代)의 군주상인
군사(君師;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고 가르치는 존재)였다.
영조는 보양청 단계에서부터 정조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1757년 6살인 어린 원손을 불러 [동몽선습]을 외우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자리에는 원손을 불러 [소학]을 외우게 함으로써 학습 진도를 점검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수시로 정조를 데리고 경연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토론하도록 하였고,
유교적 덕치와 군사로서의 국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후일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정조는 여러 방면에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정치를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개혁과 대통합을 위하여
즉위 이후 정조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를 홍국영을 통해 추진하였다.
동시에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 구현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4년 정도 경과한 시점까지 자신의 정적들의 제거에 일단락 성공한 정조는
이후 각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