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설총

sunking 2014. 4. 27. 12:51

 

설총 ‘화왕계’로 유학의 가르침을 전하다

설총 이미지 1

 

원효의 아들이면서 원효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앙 받은 사람이 설총(薛聰)이다.

아버지가 불교였다면 아들은 유교에서 거목이었다.

신라의 두 축 곧 불교와 유교가 이 부자에 의해 세워지지만, 서로가 그리워했을 뿐

지나간 자리의 자취를 우리는 밟지 못한다.

설총이 남긴 글 ‘화왕계’를 통해 그의 사상에 조금이나마 다가가 볼 뿐이다.

경주 설 씨의 뚜렷한 자취를 남긴 사람

설총은 자가 총지(聰智)이고, 할아버지는 담날 나마이며 아버지는 원효이다.

이는 [삼국사기]가 전해주는 설총에 대한 기본 정보이다.

경주 설 씨 집안에서는 6촌장의 한사람인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虎珍)을 시조로 삼는다.

유리왕9년(32)에 6촌이 6부로 개칭할 때, 고야촌은 습비부로 바뀌고 설 씨를 하사받는다.

이 설 씨 가운데 역사상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기로는 원효의 아들 설총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 비해 설총에 대한 세세한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원효의 아들이며, 이두(吏讀)를집대성한 이로, ‘화왕계(花王戒)’라는 명문을 써서

우리 문학사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는데도, 전설로만 우리 곁을 맴돈다.

삼국 시대 인물 가운데 그나마 이 정도가 어디냐 하겠지만 말이다.

경북 경산시에 있는 삼성산 아래에, 이곳이 설총의 고향이라고 하면서,

원효와 일연과 더불어 세 분 성인이 났다는 전설이 있다.

삼성산은 경산시 남산면과 자인면 그리고 남천면을 가르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다.

이 산 아래 남산면 하대리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다.

원효의 아들 설총을 모셔 본디 도동재(道東齋)로 불리던 것을, 마을의 유림들이 최근 규모를 키우고

서원 간판을 달았다. 도동재에는 자그만 봉분과 그 봉분 앞의 신도비가 전부였었다.

봉분은 설총의 묘라고 말한다. 설총의 탄생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말이 많다.

원효가 계를 범하며 요석공주를 가까이 하자고 들어간 집이 경주의 요석궁이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저 유명한 몰가부(沒柯斧) 설화의 한 대목이다.

설총을 낳자면 거기지, 야합이나 마찬가지인 마당에 굳이 궁벽한 시댁을 찾아

이 산 아래까지 왔겠느냐 말하지만, 어찌됐건 원효의 아이를 가진 공주가

시댁 동네를 물어물어 찾아와 유곡(油谷)에서 아이를 낳고,

유천(柳川)에서 자랐다는 기록이 [홍유후실기목록(弘儒侯實紀目錄)]에 적혀 있다.

두 지명은 삼성산 근처, 지금도 쓰고 있는 남산면의 동리 이름이다.

신라 최대의 스캔들 몰가부 설화

[삼국유사]에 실린 몰가부 설화는 이렇다. 하루는 원효가 거리에서 소리 질러 노래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려나…….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자루 빠진 도끼라는 말의 원문이 몰가부이다. 사람들은 뜻을 알지 못했다.

 

그때 태종 김춘추가 듣고는,

 “이것은 스님이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겠다는 말일 게야.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있으려고.”라고 하면서, 때마침 요석궁에 과부로 지내는 공주를 떠올렸다.

춘추는 궁궐 관리에게 원효를 찾아 데려 오라 명하였다.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오다 문천교를 지나는데, 관리를 만나자 거짓으로 물속으로 떨어졌다.

위아래 옷이 몽땅 젖었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입히고 빨아 말리게 하였는데,

그러자니 자고 가게 되었고, 이어 공주는 태기가 있었으며, 설총을 낳게 되었다.

 

설총의 탄생은 한 스님을 파계 시킨 스캔들의 소산이었다.

정작 원효 자신은 파계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속인으로 돌아와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부르며, 이때부터 도리어 일반 백성을 향해

부처의 이름을 더욱 높이 외쳐 알렸다. 승려와 과부 공주 사이에 태어났으나

설총 또한 출생의 비밀에 얽매지 않고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 모습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설총은 나면서 영리하고 밝아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해, 신라의 열 분 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말을 가지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세간 풍물과 이름을 통하게 하였으며,

육경(六經)과 문학을 뜻풀이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경전을 배우고 익히는 자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설총을 두고 평가한 말과 비슷하다.

 ‘성질이 총명하고 예리하며, 나면서부터 도술을 알았다.

우리말로 9경을 해독하여 제자를 가르쳤으므로,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주로 삼고 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경산의 서원이름이 도동(道東)인 것도,

유학의 도가 설총으로 인해 이 땅에 처음 꽃피웠다는 의의를 강조한 바이다. 

화왕계(花王戒)에 보이는 설총의 생각

설총이 지은 글은 벌써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무렵에도 거의 사라진 듯하다.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남았어도,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다.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남았다는 것이 아마도

‘감산사 아미타여래 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 같은 비문이리라 여겨진다.

그런 설총의 글로 오로지 우리에게 전해는 것이 ‘화왕계’이다. 글 속의 상대역으로 신문왕이 나온다.

한여름 어느 날 왕이 설총과 마주하였다. 높고 밝은 방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비로소 개고 바람이 시원하구나.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고상한 담론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하겠느냐. 그대는 반드시 색다른 이야기도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는가?”

 

왕의 발언이 이런 정도라면 왕과 설총 사이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설총은 예전에 꽃의 왕이 처음 들어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며 말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신문왕과 설총 사이에 먼저 실제 대화가 있고, 이것을 글로 옮겼다고 보인다.

글은 한마디로 우화에 가깝다. 꽃밭을 하나의 나라로 설정하고,

꽃의 왕과 신하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는데, 세상의 사람의 그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향기로운 꽃동산에 꽃의 왕이 심어져 푸른 장막으로 보호 받고 있었다.

봄이 와서 피어난 꽃은 온갖 다른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다. 역시 꽃의 왕이라 할만 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왔다. 왕을 배알하려는 목적이었다.

여기서 두 꽃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은 꽃이다. 간들간들 걸어와 얌전하게 앞으로 나오며 왕에게 말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사내로 설정되었다.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었다.

한눈에도 볼품없는 꽃임을 알게 한다. 게다가 힘없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와 말했다.

“저는 서울 밖의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의 빛깔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름은 할미꽃이라고 합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생기는 것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상자 속의 준비물에는 반드시 양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극약이 있어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 말에 생사와 삼베 같은 좋은 물건이 있다 해도, 왕골과 띠 풀 같은 천한 물건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군자들은 만의 하나 결핍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습지요.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이 두 꽃을 두고 왕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장미와 같은 화려함의 극치에 마음을 둘 것인가,

할미꽃과 같은 볼품없지만 결핍에 대비할 상대를 고를 것인가.

선택을 채근하는 신하에게 왕은 차라리 솔직한 제 심정을 밝힌다.

할미꽃 사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라면서,

은근히 장미 쪽에 기울어 있다. 그러자 사내가 왕 앞에 다가서 따끔한 충고 한 마디를 날린다.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왔더니,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 된 사람치고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은 낭서 정도로 지내다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도리가 이러하였거늘 저인들 어찌 하겠습니까?”

풍당(馮唐)은 한 나라 때 사람인데, 중랑서장(中郞署長)이라는 낮은 계급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올바른 정치를 해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좀체 그 이상 진급하지 못했다.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실속 있는 신하를 얻어야 하며,

신하는 행여 쓰임 받지 못하여도 크게 낙심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의 인식체계가 보이는 결론이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애모하며

신문왕은 설총의 말을 우화로 받아들였고, 진실 된 깊은 뜻에 공감하였다.

‘기록해두어 왕이 된 자의 경계로 삼게 하기 바란다’고 한 점을 보면,

역시 설총이 왕과 나눈 대화가 나중에 글로 옮겨졌으리라 보인다.

이 일로 신문왕은 설총을 발탁하였다.

원효의 아들이었지만 설총은 불교와 거리가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등 뒤에는 불교가 보인다. 아니 아버지인 원효가 보인다.

원효가 입적한 다음이었다.

설총은 유해를 잘게 부숴 얼굴 모양 그대로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

분황사는 원효가 생애를 마친 절이었다. 아들로서 설총은 아버지를 경모하며

자신의 생애 또한 마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설총은 때로 분황사로 예불하러 갔다.

그러면 얼굴 형상이 홀연 돌아보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 일을 적으면서 ‘지금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라고 하였다.

‘지금’이란 일연이 사는 당대를 말하는 것 같다. 심지어 원효가 거처하던 토굴로 된 절 옆에는

설총이 살던 집의 터가 있었다고도 하였다. 설총은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고, 흔적이 남은 곳에서 살았다.

[삼국사기]에는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 소개되어 있다.

일본국의 시인이 신라에서 사신으로 온 설 판관에게 준 시의 서문이다.

“일찍이 원효 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보지 못해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듣자하니 신라국 사신 설이 바로 거사의 손자라고 하니, 비록 그의 할아버지는 보지 못하였으나,

손자 된 이를 만나보았으니, 기뻐서 시를 지어 그에게 준다.”

원효의 이름이 일본에까지 전해진 소식은 다른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

거기에 손자의 존재마저 보이는데, 김부식조차 손자의 이름은 모른다 하고 말았다.

 

원효에게 다른 아들이 있을 수 없다면 손자란 설총의 아들임에 틀림없는데,

이 엄청난 계보의 사람들은 홀연 역사 속에 몸을 감추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설총은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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