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실록1 | 선덕여왕
'실패한 지도자 선덕여왕_유석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
신라부기여자, 처지왕위, 성난세지사, 국지불망행야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웠다고?
한국사의 기본 상식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여왕은 단 세 명, 신라에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여왕은 최초의 여왕이었던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입니다.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덕여왕은 대중의 인식 속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지혜로운 군주’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이라는 업적을 남긴 임금’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탤런트 이요원이 주연한 TV 드라마 ‘선덕여왕’(2009)에서는
‘정적(政敵)과 싸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인물”로서 형상화하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정말 큰일날 소리다.”
왜냐하면 여왕의 재위 기간인 15년은 정치·외교·경제·사회적으로 신라가 커다란 위기에
몰린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 때 이룩했던 신라의 중흥이 이 때에 이르러 빛을 잃었고,
신라는 바야흐로 망국(亡國)을 코앞에 둔 누란(累卵)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몇몇 기록대로 개인적인 현명함이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이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가적인 곤경을 뒤집을 능력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즉위하다
그러면 어떻게 선덕여왕, 본명 덕만(德曼)이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보다도 반 세기 전에
여성 군주로 즉위할 수 있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흥왕의 차남인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은 서기 576년에 즉위해 579년까지 왕위에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 “가을 7월 17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이와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정란황음·政亂荒淫)”
신하들에게 폐위당했다는 것입니다.